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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가 봉납으로 밀봉된 가을이 보낸 서신 한 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11.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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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비치는 창가에 앉아 연필로 서걱서걱 글씨를 쓸 때처럼 나른하다. 유리잔에 담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집어 들 때 따듯한 감촉이 그리워진다. 집안의 그늘진 곳에 손거울에서 반사된 빛이 얼굴을 드러내며 돌아다닌다. 발치에서 뒹굴다 몸을 핥던 반려견이 느닷없이 고개를 휙휙 돌리더니 빛을 잡겠다고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게으른 내 눈도 그 뒤를 따라 빛을 쫓는다. 따듯한 햇살을 따라 걷고 싶은 계절이다. 조금 도톰한 카디건을 꺼내 입을 정도의 서늘함이 허공을 채웠다.


긴 여름의 끝을 잡고 가을이 왔다. ‘깊다’라는 형용사가 어울리는 계절. 의도하지 않아도 '생각이 듬쑥하고 신중해진다'. 나뭇잎은 붉고 노란색으로 물들어간다. 서서히 깊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하나, 둘 떨어지기를 주저하지 않을 때, 조약돌처럼 예쁜 말로 작별의 말을 건네면 된다. 가을은 쓸쓸하지만 깊어서 은밀함을 즐기면 되는 계절이다. 아직 초록이 남은 잔디 위에 참나무 잎이 날아와 뒹군다. 코끝만 차가워지는 공기가 감정을 깨운다. 여름과는 달리 불어오는 바람이 내 몸을 휘감고 돌면 찢어진 페이지처럼, 무언가 사라져간 언덕 저 너머처럼, 텅 빈 자리가 휑하다가 웅숭깊어진다. 그 깊이에서 전해지는 감각이 잠시 나를 멈추게 한다.


틈만 나면 숲을 걷는다. 아니 숲에서 멈춘다. '자연은 위대한 도서관'이라고 했던 헤르만 헤세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자연은 내게 시를 읽는 일과 같다. 그 어떤 책보다 더 깊이 있는 삶을 길어 올리는 우물과 같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의 안색을 살피며 숲길로 접어드는 일이란, 여러 다발의 이야깃거리를 들으러 가는 길처럼 달뜬다. 그곳에서 만나는 이야기, 여기저기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들꽃의 말을 먼저 듣는다. 감국, 산국, 구절초, 개미취, 쑥부쟁이, 뭉뚱그려 들국화라 불러도 감미롭고 그윽한 가을 언어들이 한꺼번에 코끝을 맴돌며 기분 좋게 한다. 조금 더 나뭇잎 밟는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산사나무 길이 있다. 내가 봄이면 작은 구름 동산이라 부르는 곳. 


가을은 산사나무의 절정을 볼 수 있다. 잎사귀 사이에 붉은색이 맺히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산사나무 열매를 처음 봤던 스무 살 무렵의 심장을 되찾는다. 초록색 너머로 붉은빛이 얼핏 설핏, 복숭앗빛 양 볼에 솜털이 앉은 소녀가 화장품 진열장에서 입술에 슬쩍 발랐다가 냉큼 지워버렸던 립스틱 색깔이다. 너무 깊어서 소녀보다는 여인에게 어울리는 그런 색. 가을이 깊어지면 산사나무는 붉은 열매를 떨군다. 치맛단이라도 펼쳐 받아야만 할 것처럼 톡 톡.


연서가 봉납으로 밀봉된 것처럼 가을이 보낸 서신 한 줄, 오솔길 바닥이 산사나무 열매로 봉인됐다. 발을 딛고 서 있기 아까워 빈 곳을 찾는다. 둥치에 기대고 서 있으면 붉은 가을이 머리 위에서 윙윙거린다. 나무에서 만들어진 붉은 언어들이 나뭇잎처럼 땅으로 떨어진다. 감정의 일부가 아닌 모든 감정을 품은 채 난 가을을 읽는다.


밑 빠진 독처럼 어쩔 도리 없이 마음이 새나간다. 살아있어서 느껴야 하는 공허가 숲에서는 깊어진 끝에 꽉 찬 긍정에 이를 때가 있다. 겉과 속이, 밖과 안이 뒤엉키고 뒤섞이며, 다른 것들로 채워지기도 하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늙은 굴참나무 가지에 마음을 걸어두고 아득한 투명을 만날 수 있는 구부러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곳에서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위한 생각들이 태어난다. 그래서 걷는 것과 더 깊은 사랑을 하게 되는 계절. 읽는 것을 사랑하고 쓰는 것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어느 순간 가을이 데려온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저녁이 이른 밤으로 바뀌기 전, 스러지는 햇빛이 던지는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도시가 변해가는 모습 사이로 걷는 것이 좋다. 낮에도 걷고 싶고 서늘한 바람과 함께 밤에도 걷고 싶다. 해가 있어도 먹구름이 덮어도 걷고 싶고 비가 내려도 걷고 싶다.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걷는것이 잠시 멈추어 쉬는 것처럼, 그것이 내 삶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다음 길의 여정 곳곳에 떨구고 올 것이 기대된다. 
나무가, 자연이 깊어지고 비워지는 이 가을날에.

 

김지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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