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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미역과 다시마, 교역품으로 애용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11.0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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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임에도 불구하고 완도는 무척이나 많은 고인돌 유적을 가지고 있다.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당시에 그만큼 살기가 좋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완도에는 25개 지점에서 245기의 고인돌이 존재하고 있다. 섬지역에서 이만한 고인돌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당시 사람들이 의식주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문화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다에서의 수렵과 채취로 충분히 식량을 확보하고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여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기록에 없던 선사시대의 증거로 보아도 완도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바닷가는 먹을 것 천지이다. 부지런만 하면 굶은 죽을 걱정은 없다고 한다. 언제 어느 때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먹거리를 해결해준다는 것은 풍족한 삶을 가능하게 하고 교역을 가능케 하며 나아가 상업적 거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신라 8대 아달라왕(157년) 때의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연오가 바닷가에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던 중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 땅으로 가게 되고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비상한 사람으로 여겨 왕으로 삼았다는 전설이다. 해조류의 채취만으로도 충분한 부를 이루고 나아가 세력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최초로 전하는 것이고 나아가 해조가 중요한 요소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포항 영일만 전설의 기초가 되고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미역을 따러 바위에 올라섰더니 바위가 움직였다고 구체적으로 미역을 따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태양신에 관한 한국의 신화로 보고 있다. 따라서 신라에 있던 미역 등 해조류를 따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아달라 12년, 167년)의 기록에 나와 있다. 즉 신라역사상 최초의 ‘반란’이었던 아찬 길선의 모반이 일어나자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미역을 채취하여 부를 축적한 길선을 죽이려 하자 백제로 피신하였다. 길선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신라와 백제가 전쟁을 벌렸고 이후 길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아달라 왕은 신라 마지막 박(朴)의 왕이라는 점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결국 길선은 미역을 채취하여 사회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또한 당시 사회에서 미역은 중요한 물자였고 사회경제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해조류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역시 미역에 대한 기록이다. 당나라 서견(徐堅, 659-729)이 지은 초학기(初學記)에는 “고래가 새끼를 낳으면 미역을 뜯어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고려사람(高麗人)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고려인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미역을 채취하고 미역으로 경제적 부를 얻으며 미역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일본승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839년 9월 28일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사께서 곤포 열 묶음과 해송 한 보따리를 주었다."
장보고의 청해진제국 당시에도 곤포(昆布)라 하여 미역과 다시마가 중요한 물목으로 이용되었으며 또한 사찰의 스님들에게 제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청나라 때의 성경통지(1683년)에는 “발해의 미역이 유명해서 당나라와 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에 있어서 미역은 중요한 교역물품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국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가 중국에 미역과 다시마(昆布) 등을 조공했다”라는 기록도 있다. 또한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의 기록이 있다.


서긍이 당시 송나라에서 장보고의 청해진 전진기지였던 흑산도를 경유 낙월도, 송이도, 위도, 선유도를 거쳐 개성으로 간 경로를 보면 한반도 서남해안에서는 미역과 다시마의 채취 및 섭취가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엔닌(圓仁)과 서긍(徐兢)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해조류의 생산, 곤포 즉 미역과 다시마가 식생활에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근거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땅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해산물을 배에 싣고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地瘠民貧, 惟以海産)”는 기록(1058년)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미역과 다시마는 완도뿐만 아니라 탐라 및 서남해안 섬지역에서 중요한 물목이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일본 및 탐라국, 중국과의 예물 및 진상품으로 이용된 것을 쉽게 기록으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683년 2월의 기록으로 유추하여 당시 청해진 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일길찬 김흠운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자 하여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어 날짜를 정하고 대아찬 지상에게 납채하게 하였다. 폐백이 15수레, 쌀, 술, 기름, 꿀, 장(醬), 메주, 포(脯), 젓갈이 135수레, 조가 150수레였다."


기록에서 보이듯 당시에 쌀이 주식이었고, 장과 메주를 담가 먹었으며, 어류나 육류를 말린 포가 있었으며 젓갈이라는 발효문화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청해진제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더 다양한 해조류와 어류 식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나 젓갈을 말하는 곳에서 청해진제국을 중심으로 삼고 낙동강 하구의 진해와 서해 발해로 향하는 관문인 압해(押海)가 장보고의 청해진권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당시 신라사회의 의식주에 있어서도 압해를 중심으로 한 서해의 젓갈문화가 서남해안 백성들의 주요 소득원으로 신라로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쌀과 보리 등이 주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젖갈은 반찬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난호어목지(서유구, 1820)의 기록이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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