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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을 찾고 자신의 이름을 가슴으로부터 호명하는

꺼져가던 완도대교의 불씨를 되살려낸 황봉현 씨, 아들에게서 듣다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1.11.0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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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10년 공부한 것보다 어머니의 뱃 속 10달 공부가 낫고 어머니의 뱃 속 10달 공부보다 아버지의 하룻밤 가르침이 더 낫다.
동서고금 어머니의 사랑이 최고라는 것엔 두말이 필요 없지만 엄마는 마음이라서, 그 마음은 또 자기 본성에서 발현되는 자기중심적인 것이기에, 결국 본성을 벗어나는 가르침의 본질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최고란 이야기.
내 삶에 있어 본질적 물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음 때문에 저러한 말이 나와겠다.


어느 날, 문자가 왔다. 
본보 31주년 창간특집 때, 보도된 <박정희와 이병철, 그들은 왜 완도를 찾아왔을까?>와 관련한 기사에서 “황철웅입니다. 완도신문 홈피에서 '황봉연' 검색하시면 2010년도 기사에 "완도대교 한강철교 잔해물 맞다란"제목으로 기사가 뜹니다. 맨위에 1992년 군지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특집기사와 비교해 검토 부탁드립니다. 제 선친인 황봉연 씨가 큰공을 드린걸 기사에 나오는 김덕수 씨 아드님이나 이런 분들이 지금도 말씀하곤 합니다. 물론 유지분들과 같이 노력하셨겠지만 공로를 세우신 제 아버님의 이야기가 빠져 있기에 말씀드립니다. 역사이기에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무쪼록 바쁘시더라도 꼭 비교해서 정정기사 부탁드립니다."


본지 2010.10.06.일자 기사를 검색했더니, 내용이 나온다. 
<제2공화국 시절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군외 출신 김선태 의원이 무임소장관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완도대교 건설을 위해 머리를 한데 모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민운동촉진회 회장 박노민과 박열지(완도읍장) 부위원장 차평노, 차윤일, 한태오 중심으로 노력했지만 그 뜻을 이루어지 못한다.>


<이후 정간용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박노민, 김동오, 한태오, 김덕수, 이태한, 지종천, 차윤일, 민옥기, 최동열, 김경석, 김천두 씨 등이 주축이 되어 앞선 국민운동촉진회의 활동을 잇는다. 5.16 쿠데타 때로 전라남도지사 권한대행 송호림 장군이 완도를 방문하자 황봉연 씨가 군민의 가장 큰 숙원사업으로 연륙교 가설을 건의하면서 주춤했던 사업이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진위의 활약상 또한 두드러진다. 면담을 회피한 5.16 군사 정권 최고위원들의 방문한 지역을 직접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해 건립타당성을 인정받는가 하면 중앙부처를 방문해 예산을 따내기도 했다.>
<군민 다수의 이익보다 사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국고보조사업에 개입해 국비를 횡령한 인물이나 사회지도층을 자처하고 나선 지금의 일부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완도의 앞날을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완도대교 사업 과정에서 어민들의 김 양식장에 조류의 변화로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각을 세우는데 1000만 원이 소요되었으며 공사기간도 6년이나 걸렸다.  당시에서 어민들이 피해를 우려하는 공법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로 신중을 기했다.>   
<폭이 4,7m 밖에 되지 않은 완도대교는 자동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수밖에 없이 비좁았지만 당시 군민들은 만족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완도대교가 없었던 시절에 군민들이 남창에서 3t급의 똑딱선으로 30분간을 타고 달도 동쪽을 돌아 건너는 등 많은 불편을 겪었기 때문으로 풀이 된다.>


31주년 창간특집에서 다룬 박정희와 이병철이 왜, 완도에 왔을까에 대한 보도는 실상, 완도대교에 대한 특집은 아니었다. 

 

실력자들이 완도까지 방문하게 된 이유가 핵심이었고 그 당시 지역을 위해 유지들이 어떻게 힘을 모으고 희생적 면모를 발휘했는지를 간접적으로 피력하는 정도였는데, 군지와 본지 보도에서도 보듯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낸 장본인으로 황봉연 씨가 소개되고 있다.


만세불간에 스승은 출람(出藍)이고 아버지는 승어부(勝於父) 라 했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는 인걸이 되는 걸 최고로 치고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을 이기는 것을 진정한 효라고 여겼는데, 그건 제자와 아들도 마찬가지.
여러 유지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보도였는데 아버지가 빠져 있자, 아들의 입장에선 못내 서운했을 터. 

또, 첫 열림이란 것은 지극히 대단한 일로서. 
드디어 간절히 기다리던 그것이 열릴 때의 두근거림이란, 그 고진의 손때가 묻은 낡은 궤짝을 열어젖힐 때 황금빛으로 새어나오는 침묵의 행간!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비춰지는 매혹적인 광채란 그 침묵을 깨뜨리고 나왔을 때다. 
그들의 헌신적인 공리적 희생이 있었음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환한 빛을 보며 편리한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완도읍에서 빨래방을 운영하고 있는 황철웅 씨.
완도에서 미역 다시마 공장을 하다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서울에 올라가 식당업을 하다가 다시 완도로 내려와 빨래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 황봉연 씨는 철웅 씨가 고교시절 돌아가셨다고. 직업군인으로 서슬퍼런 시절, 헌병대 별상사(특무상사)를 지냈는데 완도에 올 때는 권창을 옆에 차고 군용 짚차를 타고왔다고. 아버지의 짚차는 배로 선적해 읍내까지 오게했다고 했다는데, 아버지 친구들은 아버지의 권총을 만져보면서 신기해 했다고.  

 

직업 군인을 전역한 후엔 완도군청 병무계장으로 자리를 옮겨 완도의 젊은 이들의 병역을 담당했다고.
이후 완도군수협 초대 신용 상무로 재직하면서 수협의 기틀을 잡았다고 했다. 각 지역 수협 지소들이 활성화가 안됐을 때 섬지역 지소장으로 파견 나가 1~2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면 치킨을 사줬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완도의용소방대장(창설에 공헌), 완도군체육회 1대~ 2대 회장(창설에 공헌)을 지냈는데, 본관은 장수, 완도출생으로 성품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청렴결백했다고.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고 어머니인 오정의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3남 3녀를 뒀는데 장손 황원태 씨는 수학박사로 현재 전북대교수로 재직 중이란다. 
살아계시면 올해 나이 92세인데, 완도군 번영회 부회장으로 있을 당시 병을 얻어 53세에 돌아가셨다고.. 묘역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고. 

 

 

철웅 씨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성품으로 1970년대 도로정비사업을 담당했을 때 그 흔한 땅 몇 뙈기도 남겨놓치 않을만큼 공정했고 돈 욕심이 없었다고. 
그때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악수하던 청해여관 최복렬 씨와 아버지는 동서지간이었다고 했다. 


박정희편 특집보도에서 언급된 지역 유지들과는 하나같이 각별한 관계였다고 하는데, 가끔 아버지의 지인들이 아버지를 회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리워진다고.
세상사는 이치는 같아서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던가! 
한방울 한방울이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떨어지고 있다.
아버지가 그렇듯 나도 내 아들도 그 자리에 떨어지는 것, 그것이 지극한 것이다. 
그 안에서 깊어지고 자유로워지는 사랑, 자신의 이름을 찾고 자신의 이름을 가슴으로부터 스스로 호명하며 걸어 온 그 시간들이 자유라는 징검다리를 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 아버지와 아버지, 그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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