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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남 한선기능장 “전통배 만드는 일, 가장 큰 보람”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10.0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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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만드는 사람을 배무이라 부른다. 지금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한선기능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예전에 배 만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단다. 우리의 전통 배를 후대에 알리려고 외길 인생을 살아온 배무이 마광남 옹을 만났다. 그는 우리의 전통배를 연구해서 복원했을 뿐 아니라, 임진년, 정유년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거북선에 관해서도 후대에게 전하려고 흩어져 있던 자료를 빠짐없이 정리했다. 


거북선과 이순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러나 거북선을 제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정확한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 마광남 옹은 거북선을 만든 사람들과 전쟁 속에서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이들까지 모두 기억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배무이가 쓴 거북선’ 출간,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그의 열정

 

그동안 학계에서는 거북선을 많이 연구했지만, 거북선의 형태와 내부 층수 등의 논란이 있다. 마광남 옹은 후손이 확실하게 거북선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자료를 한 곳에 모아 책도 냈다.


학술적인 측면으로 연구했던 거북선과는 다르게 배 만드는 현장 위주의 목재 준비와 배 만드는 과정, 전통 항법 기술 등 기술적인 내용을 생생하게 담아 지난 2011년, ‘배무이가 쓴 거북선’을 출간했던 것. 그것은 후세대에 우리의 전통 배에 관한 이야기를 남기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만들어 복원한 우리의 전통 배와 모형이 전시된 곳이 많다. 가깝게는 우리지역 죽청리 장보고기념관과 화흥포 어촌민속전시관에 어민이 사용한 어선에서부터 상인들의 무역선, 세곡선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 승리한 지역마다 충무공 관련한 기념관에 판옥선과 거북선에 이르기까지 마광남 옹의 손을 거쳐 복원된 우리의 전통 배가 많다.

 

왕가 위주의 기록 보다는 
민간기록이 더 요구되는 시대로

 

그는 완도 ‘가마구미’라는 어촌의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었다. 배를 늘 가까이하며 살면서 그가 알고 있는 것 중 단 한 가지만이라도 후대에 바르게 전해지기를 그는 바라고 있다.


50년간 배 만드는 외길인생을 걸어온 배무이 마광남 옹.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16년 8월, (구)서울역, 문화공간에서 열린 대한민국 기능전승자 작품공모전에서 그는 또 한 번 한선의 매력을 전국에 알렸다. 마광남 옹은 종이 위에 집을 한 채 그려보라고 한다. “지붕부터 그렸다면 당신은 아마도 집을 지어본 경험이 없다. 집을 지어본 목수는 결코 지붕부터 그리지 않는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려 나간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다”고.


“내가 죽으면 요것이 고만이것다, 흔적도 없것다 싶응께 안되것더래니께. 맥이 끊기는 게 아깝고 서운해서 혼자 맘이 급해졌제. 내가 할 수 있는 맨큼은 다 맨들어 놓고 남겨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2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완도 화흥포의 송대목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비좁은 컨테이너박스가 그의 작업실이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여 하루 꼬박 11시간 정도를 일했다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그렇다고 돈이 돼서도 아니었단다. 


그는 군 제대 후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완도조선소에서 목선 만드는 일을 했다. 일도 재미있고 돈벌이도 좋았다. “내가 만들어낸 배가 바다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재미지고 오져. 바다에서도 배들끼리 누가 더 빨리 간가 무언의 경쟁이 일어날 때가 많네. 이기고 온 선주가 아따 ‘누구 목수가 만든 배 참 잘 가데’라고 넌지시 한마디 건네면 그게 제일 큰 칭찬이고 보람이었지 뭐.”


잘 만든 배라면 물의 저항력을 최소화하고 기울었다가도 빨리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복원력이 좋아야 하고, 특히 뱃머리 부분을 날렵하게 만들어야 솜씨 좋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각도가 너무 커도 배가 기우뚱해지고 각도가 너무 작으면 속도가 떨어지므로 각도를 적절히 날렵하게 뽑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한창 배 만드는 일에 재미가 붙을 무렵 FRP 선박이 나오면서 목선 수요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서 결국 그 일을 접게 됐다고.

 


“목선은 파도가 있을 때도 항해하기 좋고 환경 면에서도 좋제. 기관만 제거해서 물속에 가라앉혀도 되고. 그러면 그것이 어초라고 물고기 아파트 역할도 하잖여. FRP 배는 썩지도 않고 뒤처리하기가 골칫거리제.”


배 만들기를 잊고 딴 일로 생계를 꾸리며 살아온 지가 수십 년인데 몇 해 전부터 새삼스레 배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오매 미쳤가니 돈도 안 되는 일에 빠졌다냐.” 주변에선 말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본격적으로 배 모형 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97년. 제일 힘든 건 자료수집이었다. 같은 연대의 배를 참고하기 위해 일본, 중국에도 가보고 선박에 관한 기록이 한 줄이라도 나와 있는 책이면 모조리 구해서 읽었다. 증언도 열심히 구하면서. 2년 전께 강진의 옹기 운반선을 만들 때도 그랬다. 강진 칠량에 옹기 운반선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90세 된 노인의 증언을 토대로 배를 조금씩 만들어 나갈 때마다 차에 싣고 강진으로 달려가서  얼굴 맞대고 배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연구했다. 그렇게 완도와 강진을 열다섯 번 오간 끝에 옹기선을 완성했다. 


“인자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졌구만.” 드디어 노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공력을 쏟았어도 일단 만들어진 것에는 미련이 없다. “언제라도 복원할 수 있게끔 내 머리가 기억하고 내 손이 기억하고 있으면 그 뿐.” 힘들여 만든 옹기 운반선도 강진군청에 기증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배만 나오면 정신이 홈빡 쏠린다.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보다가 대동강에서 백범 김구선생이 탔다는 배가 얼핏 한 장면 소개되는 걸 보고 방송국에 수소문해 그 비디오테이프를 구하기도. 산에나 숲에를 가도 나무를 보면 ‘오매 저것으로 배 만들면 좋것네’라는 욕심부터 난다. 소나무, 삼나무, 밤나무, 가시나무, 가죽나무, 비자나무, 굴피나무, 녹나무…각각의 수종 성질에 따라 쓰면 좋을 배의 부분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배에서 제일 만들기 어려운 부분은 부자리삼이다. 자연스럽게 휘어지도록 곡선 처리를 하다 보면 나무가 부러지기 일쑤. 몇 번이고 인내심과 끈기를 발휘해야 한다. 나무를 통째로 놓고 만드는 대부분의 모형 배들과 달리 원래 배의 제작공정 그대로 만드는 것이라서 더 힘이 간다. 


마광남 옹은13종의 배 모형을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복원해야 할 배 모형은 한도 끝도 없이 많은데... 바닷배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강마다 다른 강배도 만들고 싶다. 그 수많은 배 중에서도 제일 만들고 싶은 배는 장보고 선박이었다. 형태나 특징, 구조 등에 관한 기록과 자료를 구하기 힘들어서 작업은 더디지만, 열정은 변함없었다. 장보고는 도대체 어떤 선박으로 해상무역을 했을까. 남들에게는 전혀 궁금하거나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에게는 너무 궁금하고 중요한 물음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이루었나 싶었지만 후계자를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본인처럼 살았다가는 밥도 못 얻어 먹을  세상이 되버린 것. 우리 것을 하찮게 여기면 안되는 것인데... 여든의 나이 그의 얼굴에 행복과 근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신복남 기자


마광남 조선장 약력
2001년 한선기능전승자 선정(노동부 2001-5호)
2005년 대한명인 지정(대한 신문화예술교류회)
2009년 이순신 연구소 거북선복원 고증위원
2013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50호 조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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