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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과거 현재 미래까지 완도와 함께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최종회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8.2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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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과정을 거친 전복 진상품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즉, 납작하게 펴서 말린 전복인 인복(引腹), 그것을 가늘게 하여 천신(薦新) 등 제사 등에 쓰인 세인복(細引鰒), 납작하게 펴서 말린 장인복(長引鰒), 두드려서 미끈하게 말린 추포(搥鮑), 가을에 잡은 추복(秋卜), 가늘게 썰고 나서 말린 조포(條鮑) 등이다.
그리고 껍질이 달려 있는 채로 있는 유갑전복(有匣全鰒) 혹은 회전복(灰全鰒)이라 했다. 그 외에도 전복어젓과 전복껍데기(石決明)이 조선왕조실록에 전복과 관련되어 나온다.


또한 전복은 사람들의 입맛을 즐겁게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1452년 5월 14일 기록에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세자가 친히 전복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세자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렇듯 육지의 홍시처럼 효(孝)를 상징하는 물산이 된 것이다.


또한 명나라 사신에게 1459년 4월 12일 명나라 사신에게 전복젓갈젓(鰒魚鮓), 김(海衣), 감태(甘苔) 등을 기록을 볼 때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기요람에는 청나라 황제가 심양에 오면 문안하는 물목에도 진헌품으로 기록되어 있고, 연행일기에도 나오는 물목이다. 또한 진연의궤에는 왕실의 잔치에 반드시 전복이 올라가야 했으며, 각사등록에는 대전, 세자궁, 중궁전 등에 전라도에서 채취한 전복을 올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전복은 하나도 버리는 것이 없다. 내장까지도 먹을 수 있고 껍질까지도 본초강목에는 석결명(石決明) 또는 구공라(九孔螺)라고 하여 약재로 사용하고. 고단백질, 조지방, 탄수화물, 회분, 비타민 A, B1, B2, C와 나이아신 등의 영양분이 풍부하여 원기회복과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데 완도에서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식용하였던 전복이다.
그야말로 귀한 자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복하면 ‘만한전석(萬瀚全席)’이다.

만한전석은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대부터 궁중에서 유래했다.
최소한 108가지 이상의 만주식 요리와 한족식 요리를 망라한 호화 연회석을 지칭한다. 처음에는 만주족 요리와 한족 요리 가운데 산동요리에서 엄선한 메뉴로 구성되었다가 이후 광동요리 등이 추가되었다.


서태후 시대에 최전성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며칠 동안 연회가 열렸던 탓에 음식 수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중화요리 중에서도 천하일미가 모두 모인 만한전석.
이 요리는 만주족과 한족의 요리를 두루 갖춘 음식으로써, 108가지 요리를 사흘에 걸쳐 먹는다는 청나라 황실 음식으로써 명실상부 중화민족 최고의 요리.그 만한전석 중에서도 최고의 백미는 예로부터 사대해미(四大海味)라 일컫는 민어와 해삼, 샤스픽인 상어지느러미, 그리고 하늘이 내린 선물 전복 등 8종의 해산물로 이뤄진 요리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자금성을 통째로 비워 ‘만한전석(滿漢全席)’으로 트럼프를 대접했다. 만한전석에서 만석은 청의 지배 민족인 만주족 연회, 한석은 피지배 민족인 한족 연회를 가리킨다. 둘을 합쳐 만한전석이다. 두 민족과 문화의 융화를 원한 청 조정의 심모원려가 담겨 있다.
만한전석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이란 사실을 말해준다. 청의 유산으로 트럼프를 상대했으니 중국 입장에선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고 해야 할까. 시진핑은 음식 정치의 정수를 보인 셈이다.


완도하면 전복인데, 최근엔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지고 태풍 등 재해가 우려되면서 전복 양식장마다 전복을 내다팔기에 급급해지면서 생산량 과잉까지 삼중고를 겪고 있다.
과거에 비해 희소성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전복은 뛰어난 고급 해물이며 고급 요리의 대명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복은 완도의 어제였고 현재이면서 내일에도 함께할 것이란 것을 밝히며 이것으로 마친다. <끝>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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