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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스미고 물들어 머무는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7.03 10:25
  • 수정 2021.07.0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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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고여있던 어둠이 밀려나고 사물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아침 활짝 핀 수국 화분에 햇살이 가장 먼저 내려앉는다. 어젯밤에는 오래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요란한 빗소리가 어둠을 흔들어댔다. 방안에 머물던 긴 밤이 깜깜한 것을 벗어나 유리창에 부딪는 소리로 울창해졌다.


그 소리와 함께 밤새워 뒤척이며 내 삶을 검열했던 저녁이라는 시공간, 거짓말처럼 동쪽 하늘에서 불그스름한 빛깔이 번져오더니 저녁의 기억을 하얗게 지우기 시작한다. 과거로 인도했던 기억과 미래로 인도할 꿈 사이에 서 있는 어정쩡한 모습의 나도 지워진다.
요즘 계절성 우울함이 슬며시 찾아와 희미한 안개처럼 주변을 감돌다가 나를 집어삼키곤 한다. 그리고 짓누른다. 거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버거워지다가 차츰 진짜 슬픔으로 변한다.
이래저래 한 몸 추스르면 될 삶의 경로일 텐데, '슬픔'이라는 감정은 조건을 무시하고 들쑥날쑥하기에 십상이다. 특히 한 번 산다는 것의 의미가 수시로 감정을 건드린다.


아무 감정도 없이 살 수 없는 노릇이니 슬픔 하나 정도 받아들여도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내 몸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마음을 눅진하게 적실 때면 다른 무언가로 관심을 돌려 위로받으려 한다. 그래서 며칠 전 집안으로 들인 게 푸른 꽃의 수국 화분이다. 봄에 분갈이하고 남은 흙이 있어 토분에 옮겨 심었는데 꽃 색깔이 점점 옅어지더니 지금은 연두가 됐다. 풍성하게 핀 모습 그대로 서서히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 색만 흐려진다.


흐르다가 둥근 그릇이면 둥글게 모난 그릇에는 모나게 담기는 물처럼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땅이 주는 대로 파랑으로, 분홍으로, 하양으로 몽글몽글 피어나는 진심인 꽃, 그러다가 그 모습 그대로 마른 꽃이 되고 마는 수국을 좋아해서일까.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은 더위도 집을 꽉 채운 수국 한 송이면 용서가 되는 계절이다.


어린 시절 마당에 피었던 여름꽃은 수국과 붓꽃이었다. 수돗가 담벼락에 한 무더기씩 피었던 노랑과 보라색의 붓꽃, 그 옆으로 푸른색으로 피었다가 연두색으로 변했던 수국이 저녁 무렵 서녘 하늘의 구름처럼 뭉쳐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서 흔한 까닭이었을까 어린 시절에 눈에 들어 오지 않았던 꽃. 친구네 집 담장에서 폭포수처럼 떨어지던 붉은 장미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햇볕이 무더기로 쏟아지지도 않던 담장 아래서 힘겹게 피었을 텐데 보라를 품은 푸른빛 때문이었을까 먹구름처럼 우울하게 느끼고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서 알았다. 별 볼 일 없는 공간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꽃이 수국이란 걸, 은은하게 풍기는 향만큼, 그 빛깔 또한 은은하게 사람에게 물든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우울하게 하는 꽃이 아닌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꽃이다.


동창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밴드에 다양한 수국이 피었다. 고향에 사는 친구가 올린 사진 덕분이다.
우리 집 마당의 수국을 떠올린 것도 집안으로 수국 화분 하나 들인 것도 어쩌면 고향에서 날아든 그 소식이 마중물이 된 셈이다. 고향에서 옮겨져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난 무슨 색으로 피었고 또 어떤 색으로 변할지는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꽃 색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았으면, 수국처럼 기운차게 잎을 내고, 탐스럽게 피고, 곱게 나이가 들었으면 한다. 청보라 꽃 옆에서 연두에 스며들다 누렇게 지더라도 기죽지 않을 그런 수국처럼 말이다.

 

김지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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