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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해지는 것도 사랑, 나약해지는 것도 사랑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6.18 08:46
  • 수정 2021.06.1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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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세상 끝에 당신을 세우시나요.
전주 경기전 뜰에서 속뜨거운 눈물로 엎드려 절하는 매화나무 할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보소서 보이소서 어디 계시니이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공부가 나와는 멀게 느껴졌다. 야간자습을 빼고 서예학원을 다녀야겠다 담임선생님께 말씀 드렸다.그렇게 하라 허락 받고 서예학원에 등록했다.


먹을 갈고 점만 한달 가량 찍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다시 불러 "붓은 뜻이 있는 사람이 드는 거다." 의미심장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말씀하셨다. 너와 어울리지 않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붓을 놓았다. 해보라 하시곤 계속하니 그게 아니지 싶으셨는지 처음 어투와 다르셨다. 그렇다. 붓은 공부처럼 나와 거리가 멀다 생각했다. 나침반도 없이 밋밋한 삶의 무게에 깔려 붓을 잊고 살았다.


한 번도 생각지 않았기에 마음 속에 아예 없는 줄 알았다.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맥없이 살았다.
번갯불에 콩궈먹듯 이른 결혼을 했다. 감정이 날씨처럼 변덕스러워지고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차츰차츰 지겹고 따분하고 갑갑해졌다.
웃다가도 슬펐고 문득문득 우울감에 사로 잡히곤 했다.무엇인가에 갇힌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나도  일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용기내어 이일저일 찾아했다. 그러다 부동산일까지 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한가한 오후가 되면 사무실을 내게 맡기고 화방에 갔다. 눈이 펑펑 내리는 추운 겨울 날이었다. 빗자루를 들고 사무실 앞의 길을 쓸었다. 뒤돌아보면 언제 쓸었냐 약올리듯 길을 덮는 눈이 하얗게 내렸다. 눈이 내릴수록 마당쇠가된 기분이 들었다. 손시리게 춥고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눈내리는 풍경이 버겁게 현실적인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화방에 갔던 사장님이 저쪽 좁은 골목길에서 이쪽으로 눈을 털어가며 오시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림처럼 행복해 보였다. 눈쓸고 있던 빗자루까지 행복이 전해졌다.  그 기억의 시간이  용감하게 붓을 들었지 싶다.


 뜻이 있는 사람이 붓을 든다. 붓을 들으며 붓길에서 뜻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봄날의 따스한 봄기운이 나를 마중하듯 살갑게 다가왔다. 온화하신 스승님을 만났다.
외향적인 사람 붓을 들면 내면이 단단해져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몇 번 나오고 그만 두겠지." 속마음 말씀하시기도 하고 "아직도 나오네."


종종 내 인내를 은근히 칭찬 하셨다.
좋아하는 일도 싫어 질 때 있고 힘들어도 참아내는 나도 모르는 기질이 내면에 있었다
 '이 풀잎 왜 이리 안 그려지나요.'
'난초에 묻어나는 묵향이 참 좋아요.'
'툭툭툭 꽃잎 피어나는 소리도 예뻐요.' 첫눈을 기다리는 "12월의 야국을 위해 붓을 들었다." 나름 의미부여도 재밌다. 사그락사그락 푸른 댓잎 부비는 소리가 화선지에서 들리는 듯 좋다.
죽쒀대는 대나무 그림은 지친 나를 고스란히 대변했으며 스승님께서는 문인화는 느림의 미학이니 빠지지 말라 다독이시고 지긋하게 기다려 주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녕,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갈피를 잡지 못했다.


끝내 엉망진창인 붓을 내려놓았다. 여름내내 달궈진 땅의 뜨거운 기운이 꺼지고 가을 국화향이 곳곳에서 시나브로 일어설 즘, 아버님께서 하얀 국화를 떼거지로 선물 하시곤 하늘나라로 훌쩍 떠나셨다. 국화 한 송이 그리고 싶은 마음이 콧끝 시리게 왔다. "아가,미안하다. 내가 오지 말라 했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아가,내가 잘못했다."


무심한 당신 아들에 대한 불만인 것을 알지만 당신 말씀 안듣는 아들을 나보고 도대체 어찌하라 그러시는지 어린 며느리는 참지 않았다. 
명절 전 방바닥 닦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버럭 화내셨다. "니들,다음부터는 오지 마라."
그잖아도 사는 게 짜증나 죽겠는 속을 애써 참고 누르고 있었는데 터지고 말았다 "아버님 정말 다음부터 안 와도 돼요?" 당돌하게 되묻자 아버님께서 당황하셔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지금껏 나처럼  아버님께 되바라지게 말대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순간 놀라셨다.


정말 안 올까 염려 하셨다. 아버님은 버럭 화도 잘내시고 사과도 잘하셨다. 마음을 표현하시는데 성급하셨지만 마음 깊은 곳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이셨다.당신 아들 얼굴 보고 싶어 늘 찾으셨고 보는 것도 닳을까 아끼셨다.치매로 기억을 놓으실 때도 당신 아들 얼굴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셨다.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에 대해 끝없이 내리사랑 하셨다.
누가 그러더라 "지옥을 아느냐?"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숨죽여 지켜보는 것이 지옥이다. 죽어가는 두려움이 산자에게 고스란히 내리는 것이 지옥이다고. 그런 고통이 반복 되면 정신은 황폐해지고 잔인해지던지 지독히 나약해지던지 생의 기로에서 선택하게 된다.
잔인해지는 것도 사랑이었고 나약해지는 것도 사랑이었다.

 

이의숙/필수노동자(에세이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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