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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은 왜, 장보고를‘궁복’격하시켰나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29 11:29
  • 수정 2021.05.2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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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제 질서라는 골품제의 거친 바다를 헤치고 청소하겠다는 그의 이념은 당시 청해진 부근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의 동조와 호응을 얻어내었고 적극적으로 장보고의 이념에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세력권을 만들어냈다. 완도 청해진뿐만이 아니라 전북 부안과 지리산, 하동, 남원, 고흥, 장흥, 강진, 해남에 이르는 구백제권 전역을 장보고의 청해진 권역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억눌린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를 찾아 장보고에 호응했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생명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진하고자 할 때 고향이어서 완도를 택했을까? 고향이어서 택했다고 한다면 장보고는 이 세상이 이렇게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오늘 완도학을 만들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장보고는 바로 완도가 가진 인적 물적 토대를 분명히 보고 청해진의 중심으로 완도를 택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심정적 감정적인 선택으로 완도를 선정한 것이 아니라 장보고가 꾸며나갈 세상을 꿈꾸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활용하여 멋진 세상을 만들고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갖추어진 완도를 택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완도에 사람이 없고 공도(空島)였다면 장보고가 완도를 택했을까? 택했다면 무모한 짓이었고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완도에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첫째로 택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두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卷第44 列傳 第4
  大王與保臯萬人. 此後海上無鬻郷人者.
흥덕왕이 보고에게 만인의 사람들을 주었다. 이후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파는 자가 없었다.

  卷第10 新羅本紀 第10
  夏四月, 清海大使弓福, 姓張氏 一名保臯, 入唐徐州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 鎮清海 清海今之莞島.


여름 4월에 청해대사 궁복은 성은 장씨인데, 일명 보고라고 한다. 당서주에 들어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에 진을 세웠다. 청해는 지금의 완도이다).

완도가 역사에 처음 기록된 것이다. 김부식이 1145년 삼국사기를 완성했다. 그러면 최소한 1145년 이전부터 청해진이 완도라고 불려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중요한 기록이다. 완도가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이다.


당시의 신라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살펴보면 1만명의 군사를 내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해석하면서 군사라는 표현이 단지 ‘卒’만 있는데 이를 군사로 해석하여 마치 신라의 변방 청해진을 지키는 신라군진의 하찮은 하나의 대장으로 격하시켜버린 것이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장보고를 끝내 궁복이라고 격하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왕의 허락과 신라왕의 군사적 병력의 지원으로 마치 장보고가 성공한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변방의 한 장수를 중국의 공인 역사서인 ‘구당서’와 두보의 ‘번천문집’에서 먼저 기록하고, 일본의 스님인 엔닌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의 기록을 보고 김부식도 장보고을 알았을 정도이니 실제로 중국의 기록을 바탕으로 김부식이 신라사관의 입장에서 각색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장보고는 정말 완도학을 대변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완도를 완도답게 해주는 인물인 것이다.


외지이자 바다인 청해진에 아무런 이익도 없이 내줄 수 있는 실정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굶어죽고 이리저리 떠도는 판에 신라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야말로 종신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강력한 노비를 포함한 골품제 하에서 노비문제로 군사를 동원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청해진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을 장보고가 통솔하도록 허락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보고 청해진의 설진에 관한 기록 어디에도 군사를 내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것은 졸(卒)을 해석하면서 군사로 편의상, 그리고 신라사관에 맞게 학자들이 번역했을 뿐이다. 신라는 당시 완도를 지킬 군사를 둘 이유가 전무하고 또한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1만명의 군사를 둔다는 것은 이해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또한 졸(卒)은 신라시대에는 고급 무관의 직으로 쓰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 제40 잡지 제9>에 나와 있다.

  시위부의 졸
  졸(卒)은 117명이다. 관등(位)은 선저지(先沮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로 삼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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