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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완도 노화에서 마지막 요양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21 09:05
  • 수정 2021.05.2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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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역사적으로나 현재까지도 폭력 속에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이 사안을 봤었고 지금도 보고 싶기에.. 솔직히 이 글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가장 짧은 줄에 묶여 썰매를 끄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글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존엄적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수 있었고 다른 시각으로 사안을 통찰해 볼 수 있어서 다행이고 고맙습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페친님이 남긴 댓글)


중학교 2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는 외갓집(노화읍 구목리)에서 마지막 요양을 했습니다. 저는 말기암 환자가 겪는 고통을 곁에서 봤습니다. 때로는 엄마가 무섭기도 했습니다.
임종을 앞뒀을 때는 그 발작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날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저는 임종을 지켜보라는 의미로 생각했는데요.


아버지는 외갓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를 업고 아랫마을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영문도 모른 채 뒤따라 갔구요. 출가외인. 너무 슬펐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목숨보다 소중한 딸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얼마 후 재혼하셨고, 저는 또 한 분의 어머니로부터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포크레인에 받힌 사고를 당한 날, 저는 서울 노량진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내려갔지만, 완도 대성병원까지는 6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영안실이 아닌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장남이 도착하지 않았다며, 아버지를 영안실로 모시지 못하고 응급실에 그냥 모시고 있었던 겁니다.


어머니는 심폐소생술 하느라 찢어진 아버지의 런닝셔츠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고 계셨습니다. 저를 바라보시던 그때의 황망하고 절망적인 눈빛, 슬픔 어린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남편과 사별하고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한테 와 주신 고마운 어머니, 둘째 남편마저 사고로 죽게 되었으니, 그 절망, 그 슬픔을 저는 어떻게 짐작조차 못 할 것 같습니다.
김 전 차관 사건에서의 여성들의 모습은 다양했습니다. 윤중천에게 돈을 빌려준 분은 가장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윤중천과 사업문제를 논하는 여성도 있었구요. 윤중천의 거짓에 속아 자신의 성을 착취당한 여성도 있었구요. 어떤 여성은 지방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 올라왔는데, 머물 거처가 없어 아는 언니 집에서 생활하다가 윤중천의 별장에 가기도 했습니다.


별장 손님맞이 과정에서 생선을 구워주며 윤중천의 비위를 맞춰 납품의 활로를 모색하려 한 여성도 있었고,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아야 하는 주방에서 일하던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벌어진 건 아닙니다. 요약인 점을 감안해주십시오.


김 전 차관의 부인을 생각합니다. 남편의 성범죄 의혹 때문에 자택을 압수수색당하고, ‘최순실과 아는 사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린 모 의원을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했더니 “김학의 부부 멘탈 참 대단하다”는 비판을 들은 김학의 전 차관의 부인. 이 여성은 희귀성 난치병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헌법은 연좌제를 금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연좌제의 피해를 입고 있지 않나요.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헌법 제13조 제3항)
소외받는 여성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실천하겠습니다. 제 경험 속 여성들과 많이 닮아 있는 여성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박준형/변호사 본보 시론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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