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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씨, 신이 당신을 보게 하려고 빚어낸 세상의 첫날처럼

부부의 날 특집/정인호 최영미 부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21 08:53
  • 수정 2021.05.2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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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현 과장 부부는 참 멋져 보였다.
한희석 과장 또한 알콩달콩 연애 이야기도 참 많이 부러웠는데...
21일이 부부의 날. 완도신문의 원고 청탁을 받고서 고민이 깊어진다. 일단은 부끄럽다. 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하면 좋을지 그게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쓴다고 했을까?


언제였을까? 그녀가 나에게 들어온 것이.
내 심장에 어떻게 그녀가 들어왔을까?
내가 내 자신을 봐도 샌님 같아서 어디 연애를 해볼 수 있었을까만. 돌이켜보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첫 번째 발령받은 곳, 고향 완도군 고금면사무소였다.

그 곳에서 선배들에게 공직자의 자세, 민원처리 방법, 예산집행, 세금 징수 등 다양한 비법을 전수 받으면서 공무원이 무엇인지 막 알아갈 즈음 군청으로 발령받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자꾸 주말이 돼 고향 집을 가거나 출장을 갈 때면 발걸음이 꼭 고금면사무소로 향했다는 것.


머리로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드리려 갔는데, 내 마음은 머랄까? 유신공의 말이 천관녀의 집으로 향하듯 그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엔 초임 발령을 받고 근무하던 단발머리의 아가씨가 있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는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며 휘날리던 머릿결에선 정말 라일락 꽃잎이 휘날리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라일락 향기가 짙어지는데, 아 내가 뭔가에 씌웠을까?
자꾸만 나를 불러들이는 고금면사무소.
한 번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등산이란다.
용기를 내어 “그럼 우리 등산 한 번 갈까요?”그랬더니, 너무나 상냥한 말투로 “네”
날이 잡히고, 그날 밤 얼마나 설레였던가!

 

 

'이 밤, 그대 두 눈에서 아련하게 일렁이고 있는 그 별빛이 저 머나먼 은하수에서 온 것이라 한다면 그대여, 나는 그리움이라 부르리'
'산행 중 오롯이 내미는 그대의 두 손은 그리움이 닿고자하는 봄나비의 그윽한 몸짓일 것이고 아~...'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전날 밤 상상하던 그 떨림이란... 그렇게 우린 자연스럽게 등산과 낚시를 다니면서 점점 깊어졌고, 만난 지 3년이 지나, 결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처갓집 가는 길. 그 길은 또 얼마나 떨리던지, 남자가 가장 떨리는 순간이 결혼보다도 처갓집 가는 길일  것이다. 전날 어머니가 하는 말 “밥 먹게 되면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지금이야 연륙교가 연결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배를 타고 드나들던 보잘 것 없는 섬 출신. 거기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형제 또한 많은 장남. 마냥 좋을 리 없었던 장모님은 첫 인사를 온 나를 보며 큰 한숨만 세 번.


아내는 2남 3녀 중 막내딸로 집안에서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는데, 나와의 결혼이 쉽지 않았을 터. 다행히 장인 어른이 공직자 출신이었기에 어렵게 결혼 승낙. 결혼식은 당시 가장 잘 나가는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했던 장모님의 뜻에 따라 광주 금남로의 현대예식장에서 박광태 전)광주광역시장의 주례로 많은 이들의 축하 속에서 치뤄졌다. 진심이란 게 뭐 있겠는가! 처음처럼 한결같은 모습. 한숨만 안겼던 막내 사위가 아들, 딸 잘 낳고 열심히 사는 모습에 훗날 장모님은 사위 삼기를 잘했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자식 중에서 한 사람만은 본인이 원하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장모님의 로망을 풀어준 이가 우리 부부였다고.
그렇게 깨가 쏟아지고 신나는 신혼 생활은 없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막내 여동생과 함께 생활하면서 아내는 3년 내내 도시락을 챙겨줬는데, 불평이나 힘든 내색 없이 잘 견뎌 주었다.
또, 제사와 명절 때가 되면 항상 시골집으로 먼저 달려가 음식준비를 하면서 집안의 대소사가 있으면 형제들과 협의하면서 꼼꼼하게 잘 처리해 장남의 아내로서힘든 역할을 다해 주었다. 그런 아내와 엄마, 며느리에 비해 난 남편과 아빠로선 빵점같다. 첫째, 둘째 딸 그리고 늦둥이 아들까지 낳았지만 동료들과 어울려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았기에 육아와 가정의 모든 일을 아내의 몫. 맞벌이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어린이집이나 학원에서 가장 늦게까지 머무르거나 엄마 아빠의 퇴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학원을 다니게 되는 등 힘든 시간을 잘 견뎌 주었다.


슈퍼우먼 같이 억척같은 생활을 말없이 해 왔던 아내가 가장 서운한 것은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나는 동안 한 번도 아내 곁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것.
의도하거나 회피한 것은 아니지만 세 명의 아이들을 아내 혼자서 낳게했던 책임은 아마도 평생동안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며, 늘 미안한 마음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이들이 잘 자라서 우리 부부를 뒤이어 공직생활을 하고 있는 큰 딸과 직장생활 하는 작은 딸, 그리고 건강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까지. 항상 든든하고 대견할 뿐이다.

삶에서 가장 기뻤던 일은 30대 후반, 38세의 젊은 나이에 6급을 승진하면서 군수 비서실장에 발탁되었고, 그 해에 간절히 원했던 늦둥이 아들까지 태어났다.
늦둥이 아들은 이곳에선 밝힐 순 없지만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법을 실천한 끝에 그토록 바라던 아이였기에 기쁨은 배였다. 하지만 아내가 몸이 허약하여 8개월 만에 태어난 아들은 대학병원 소아응급실에서 인큐베이터에 의지하고 있었고, 출산 소식을 듣고 급하게 찾아 갔을 때 아내는 출산 쇼크로 수혈과 산호 호흡치료를 받으며 위급한 상황이었다.

 

 

당시 유명 산부인과에선 그곳 병원 개원 이래 산모와 아기 모두 가장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다행히 아들은 병원의 많은 우려를 하나씩 이겨내며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주었고, 그때서야 아내는 장남 며느리로써 소임을 다했다면서 뿌듯해 했다.
행복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와 고통의 시간이 찾아 왔다. 아내와 내가 차례로 건강에 이상이 생겼는데 아내는 폐 일부를 절단해야 한다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 다행히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 없이 약물 치료를 통해 완쾌할 수 있었다.


그때 얼마나 놀랬는지, 내 영혼을 팔아 아내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심마니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산삼을 구해 먹이고 주낙을 이용하여 자연산 장어를 직접 잡아 먹였는데, 효험이 있었는지 아내가 낫게 돼 웃음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아내가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결혼 이후 부족했던 남편의 점수를 한꺼번에 만회할 수 있었던 다행스러운 순간같다. 우리 부부는 함께 운동을 하는 등 부부 사이가 깊어지고 단단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 40대 후반 약산면장 재임시절 갑상선암을 진단받고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았을 때 아내는 요리책을 몇 권씩 구입하여 저염식 식단을 꾸준히 챙겨주어 암을 극복할 수 있었다.
부부가 젊어서는 연인, 중년에는 친구, 노년에는 간호사가 되어주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부부는 중년에 이미 서로에게 간호사가 되었기 때문에 다가올 노년에는 간호사가 아닌 연인으로 친구로 살아가고 싶다.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어느덧 27년째.
신혼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서툴러 다툼도 많았고 크고 작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고 자식들이 차례로 생기면서 더 단단해 지고 행복의 꽃을 피워오고 있지 않을까?
“영미 씨, 당신을 만나고 부터 내 영혼은 휘날리는 눈발에 곡조를 붙여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이 삶을 노래할 수 있었고, 당신을 만난 이후 떠오르는 모든 태양은 신이 당신을 보게 하려고 빚어낸 세상의 첫날처럼 반짝이고 반짝이고 있다오. 당신의 인호가”


정인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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