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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방과 신라소(18회)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1.15 11:25
  • 수정 2021.01.1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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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닌의 입당구법 순례행기에 의하면,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 사람들은 남쪽으로는 대운하, 회수유역의 내륙지역과 북으로는 산둥반도의 등주 문등현 적산촌이나 모평현의 유산포에 이르는 중국 연해안을 따라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신라인들이 살고 있다 하여 ‘신라방’이라 하였다. 신라방을 관리하는 장은 ‘총관“이라 하였으며, 신라방을 관리하는 관청이 ’신라소‘였다. 
 신라방이 있는 북쪽 산동 반도와 남쪽 회하 하류 사이에는 많은 신라선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있어 신라방 사람들은 북쪽과 남쪽에 살고 있지만 서로 끊임없이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양 지역의 신라방 사람들은 모두 적산 법화원을 그들의 정신적인 위안처로 삼고, 장보고의 보호 아래 자신들의 생업을 영위해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방에 사는 사람들은 신라인만이 아니라 백제인과 고구려인들도 신라방에서 살면서 신라인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백제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족, 귀족, 장군 등 88명과 백성 12,807명을 포로로 잡아 자기들 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8년 후인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고종은 백성 38,300호를 중국의 강남. 회남, 산남, 경서의 여러 주로 강제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들은 중국 장안을 비롯하여 산둥성, 등주현, 유산포, 문등현, 적산포 일대, 대운하 회남 유역의 내륙지방 곳곳에서 신라인들과 함께 살면서 신라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연해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주로 상업과 해운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 수리업 등이 발달했으며, 당나라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역어와 통사가 있었다.

 신라인 촌락은 산둥성 남쪽 연안지역 일대에 가장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 신라인 사회의 중심지역은 산둥성 문등현文登縣 일대였다. 문등현청에서 남으로 70여 리 떨어진 청녕향靑寧鄕에 신라인 사회 전담기구인 ’구당신라소‘가 있었다. 여기의 책임자를 ‘압아’라 하였는데 이는 주로 신라인이 임명되었다. 이런 신라인의 압아를 ‘대사’라고도 불렀다.

 구당신라소의 장인 압아가 중심이 되어 현 안의 각지에 있는 신라인 촌락들을 통괄하며 자치를 영위하였다. 신라소의 자치권은 일정 지역 내에 한하며 근본적으로 당 지방관아의 통할 아래 놓여 있었다. 신라소에서 발급했던 여행허가권을 다시 현청의 공첩(公牒)과 교부해야 현 밖으로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신라인 촌락 내의 거주와 생활은 대체로 신라소의 압아와 촌장의 권한에 속하며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서 자기 나라처럼 자기 나라 관리와 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이 자치권은 초주, 연수의 신라방 사람이던지 연해에서 무역에 종사했던 사람이던지 모두에게 허용된 것 같다. 

 엔닌 일행이 당나라 관리로부터 귀국을 강요당했을 때 신라인 촌락에 몸을 숨기려고 했던 일이나,
 신라인으로 가장하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일,
 소촌장邵村長 왕훈이 그들의 마을에 엔닌 일행을 선뜻 받아들이려고 했던 일,
 당 관헌은 신라인 사회가 엔닌 일행을 그들의 일원으로서 인정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한다면 배를 구하여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신라방에 체류케 한다는 일, 
 법화원 예불 시 신라식 예불을 드렸던 일,

 회창법난의 와중에 일본 승려들을 신라방에서 보호할 수 있었던 일 등을 보면, 확실히 신라방에는 자치권이 부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치권이 곧 적산촌에 엔닌을 체류시켜 성지순례를 가능케 했던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처럼 신라인에 대한 자치권 부여로 인하여 백제나 고구려 유망민들도 신라방에 모여 신라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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