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침묵을 사랑할 때

[에세이] 김지민 / 수필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1.23 15:03
  • 수정 2020.01.23 15:08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지민 / 수필가

시간과 침묵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그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 빛이 되었다.

말속의 침묵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ー죽음의 세계ー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이 두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고, 이 두 세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 때문에 말은 이중의 반향을 가지고 있다. 말이 나왔던 곳으로부터의 반향과 죽음이 있는 그곳으로부터의 반향을.

형상과 침묵
형상은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나고 있다. 형상 속에는 침묵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침묵 곁에 말이 있다. 형상은 말하는 침묵이다. 헝상은 침묵으로부터 말로 가는 도중의 한 정거장과 같은 것이다.
형상은 침묵과 말 사이의 경계에 서 있다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데 말이 흐르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낯설기도 했다. 작은 신발에 발을 구겨 넣은 것처럼 정적은 불편하기도 했다. 어색한 고요를 없애려 휴대폰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동안 침묵이 목적이 되지는 않았어요. 단지, 필요에 의한 의도적 음소거만 있을 뿐,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진정한 침묵은 잃어버린 건지 아니면 어색해하는 건지 그냥 소음은 늘 익숙한 삶의 패턴으로 인정하고 살았었나 봅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만나 책갈피에서 빠져나오질 못했어요. 빠져 나오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침묵을 중심에 두고 생각을 시작하고 엮어봅니다. 광범위한 소음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침묵이란 언어를 만난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침묵에서부터 시작하는 말, 소리를 내지 않고 말하는 내가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익숙한 소음이 불편하고 정적이 친절하게 스며듭니다.

'침묵의 모습'부터 하나씩 챕터를 두고 살피다가 '말과 침묵'의 관계를 풀어 설명해줍니다. 침묵과 말 사이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훑어 본 뒤에는 인간으로부터 파생된 문화를 침묵의 관점에서 풀어줍니다. 그리고 완전한 침묵인 '죽음'을 톺아봅니다, 근대 문명이 만들어낸 잉여와 충만이 결국 몰락을 만들 것이라는 전망을 하네요. 완전한 몰락, 그 뒤에 찾아오는 '새로운 희망'을 떠올리며 신과 닮은 인간의 침묵을 소망하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침묵은 자기 존재의 무게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때론 존재의 바닥을 긁어 보게도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이 책은 다 읽었다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네요. 지금도 똑같은 생각입니다. 어느 순간쯤에서 챕터 하나를 펼쳐놓으면 침묵은 나를 끌어당길 겁니다. 그때부터 난 많은 말을 소리 없이 쏟아 낼 겁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침묵의 세계'는 읽고 있는 책입니다.
어느 순간에 딱딱한 책장을 벗어나 내 지문 위에서 나를 담금질하게 할 겁니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