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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차, 용봉단차!

[완도차밭, 은선동의 茶 文化 산책 -69] 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7.15 11:33
  • 수정 2019.07.1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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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채장용봉교려, 비진만금성백병, 수지자요진색향, 일경점염실진성”(동다송7송).

 “단차위에 찍혀진 용단, 봉단, 채장은 한없이 아름다워, 만금의 비용으로 백병의 차를 만들었네, 뉘라서 알아 보리요. 나 홀로 즐기는 풍요로운 참 빛깔 참 향. 한번 다른 물질이 조금이라도 점염되면 그 참된 성품을 잃어버린다네.”

 크고 작은 용봉단은 떡을 만들어 그 위에 용봉문의 무늬를 넣었는데 궁궐에 바치는 것은 금분으로 장식하였다. 소동파의 시에, 붉은색 떡 백 개에 만전을 쓴다고 했다. 또한 만보전서에 이르기를 차는 스스로 참된 향과 참된 맛과 참된 색을 지니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한번 다른 물질에 오염되면 그 참됨을 잃는다 하였다.

 차문화의 절정기는 중국은 송,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대 유행했던 차가 바로 떡차이다. 물론 당과 신라 때에도 유행했던 차는 다름 아닌 떡차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만들어져 널리 마시기 시작하여 그 과정과 절차 등이 나름 정형화 된 단계라고 한다면, 송과 고려 때는 더욱더 발전하여 정밀하게 되고, 새로운 콘텐츠가 만들어진 시기로써 가히 시대사조를 이룰 만큼 다양화되고 화려하며 매우 고급화되었다.  사실 떡차가 아니라 덩어리차라고 해야 맞다. 덩어리차로 만들 때 그 모양이 떡처럼 생겼다 하여 병차(떡병)라 하고, 벽돌 모양처럼 생겼다하여 단차(벽돌단)라 하고, 구멍 뚫린 동전 모양처럼 생겨서 전차(돈전)라 하였다. 

 크기도 작은 동전 모양과 구슬모양에서 요즘 널리 보급되어 있는 보이차 모양의 덩어리차와 어른 한 손으로 쥘만한 크기의 반원형 덩어리차들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아무리 금분으로 장식해도 차가 갖는 순수한 고유의 성정을 놓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지혜도 발견할 수 있다. 장보고 시대의 차문화와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 하였지만, 그 시대에 만들어 졌던 떡차로 단순히 끓여 마셨던 다법들이 점점 정밀화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다법의 바탕이 된 고도의 다법들이 바로 고려의 다법이라 할 수 있다. 즉, 덩어리차를 마시려면 조각으로 나누어야 하고, 나눈 조각을 더 잘게 나누거나 부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매우 정밀한 가루내는 작업과 우려내는 방법들이 고안되었을 것이다. 마치 요즘도 덩어리차를 마시려면 조금씩 뜯어내어 끓은 물에 우려 마시는 것처럼 그 때도 이 과정을 모두 거쳤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단순히 특정 모양의 덩어리차를 만들다가 그 모양을 다양하게 변형시켰을 것이고, 그 덩어리에 다양한 무늬도 그렸을 것이다. 마침내 그 무늬가 부귀의 상징인 용과 봉황으로 바뀌게 되자 그 차가 갖는 의미와 가치가 매우 특별했을 것이다. 이름도 용봉단차로 불리면서 단순한 차가 아니라 국가간 거래되는 물목에 들어가고, 그 수요자 역시 매우 남다른 계층이었음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차는 경제와 정치 사회에 이르기까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시대문화와 사조까지 영향을 미치는 놀라운 신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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