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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보다 3일의 시간이 더 허락되기를

[에세이-모도에서] 박소현 / 청산면 모도보건진료소 소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6.07 17:27
  • 수정 2019.06.0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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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 청산면 모도보건진료소 소장

내가 어떤 사람을 더욱 좋아하게된 계기가 있었다.
맨날 엄마랑 티격태격 한다는 내 철부지 말에 물론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호감을 가진 그의 대꾸에서 이 문장이 나오자, 나는 아무 이유없이 더욱 좋아지더라.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잘해드려야 나중에 후회가 없어요.”

그랬다. 편찮으시면 용돈을 드려도 쓸 수가 없고, 좋은 옷을 사드려도 환자복을 입고 계시니 입으실 수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될 무렵 아버지는 거실에서 텔레비젼을 보시다가 지긋이 눈을 감고 잠을 청하시는듯 하더니 눈꼬리를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흐르더라.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본인도 노인인 홀아비 아들의 이야기가 나왔던 프로를 보시다...

아버지 나이 다섯에 아버지보다 늦게 태어난 두 동생에 위로 여섯이나 되는 형누나들을 뒤로하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처럼 눈이 커 별명이 눈보였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거의 안하시다, 내가 성인이 되어 갈 무렵 그리고 훗날 병환으로 많이 힘드셨을 때 나와 단둘이 있으면 눈꼬리에 한가닥 눈물이 베이시며 조용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셨다.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그곳에서 뵙고 두루 잘 지내시겠지?

엄마는 일찍 시집을 가 내 나이에 고등학생인 오빠와 내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내 한 몸 거두기가 벅찬데, 내 어머니는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내가 스물이 되던 해 아버지와 다투시고 나와 첫 술을 하시며 본인의 결혼이야기, 아버지가 교사로 시골에 부임해와 막냇동생의 학교선생님이던 아버지를 동네 어른들의 소개로 만나 식 올리고 갓 스물 넘은 나이에 오빠를 갖고 초임교사 박봉에 아버지는 분필가루 마시니 밥을 해주고 본인은 라면 한 개를 반으로 나눠 아침저녁을 드셨다는 이야기며...나를 가졌을 때엔 홍수가 나 돼지가 물에 떠밀려 동네분들이 잡아 삶은 돼지고기를 맛나게 드신 후에 나를 낳아 내눈은 좀 큰데 오빠는 더 작아 미안하다 하시고...

나는 바라는게 하나 있다. 어머니보다 3일 정도 더 살고 싶다. 내게 40여년이 남았다면 적당히 떼어 어머니 드려, 어머니 임종 지키고 장례 치르고...
엄마가 안계신 세상에 혼자 잘 버틸 자신이 없다.
모르겠다. 내게도 자식이라는 존재가 생긴다면, 이미 아버지를 여의고 그 고통의 깊이와 무게를 수년 앓았기에, 내 자식에게 덜 아픔주고자 버텨볼지 모르겠다만, 지금처럼 그때에도 혼자라면 난 다만 내 어머니를 위한 삼일의 시간이 내게 더 허락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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