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뜻 모아 하나된 3·15 독립만세 100주년 재현행사

독립선언문 릴레이 배포 새마을회, 역할 컷던‘숨은 공로자들’… ‘이별가’ 참석 군민들 심금 울려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5.07 07:32
  • 수정 2019.05.07 07:40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완도 기념행사는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가장 선봉에 완도 청년들이 있었던 것처럼 2월 28일 완도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

완도 청소년 동아리연합회 40여명 학생들이 해조류센터 광장에서 펼친 태극기 플래시몹은 완도청소년문화의집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공동기획,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진행됐다.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해 태극기 퍼포먼스는 광장을 지나가는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청년이 선봉에 서니 다음은 그 세대의 할아버지·할머니뻘 되는 노년층이 움직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의 풍물패가 모이는 ‘만북울림’행사에 청해진 열두군고팀이 서울까지 상경해 참여했다. 이들은 완도의 선열들이 전국 차원의 항일운동에서 항상 앞장섰던 것처럼 3월 1일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서는 전국 풍물패 80여팀, 1만명이 참여하는 ‘만북울림’ 행렬 가장 맨앞에서 길놀이 풍물을 두들겼다.

노년층이 움직이니 장년층도 가만있지 않았다. 전국의 문화 기획자들이 모여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는 전국모임인 재미난 연구소가 기미 독립선언문 11만부를 제작, 1만부가 완도로 내려왔다. 12개 읍·면 배포를 위해 새마을부녀회와 새마을협의회가 적극 나섰다. 그리곤 100주년을 맞은 완도 3·15 독립만세운동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12개 읍·면 전체를 돌아다니며 100년전 그날의 함성을 일깨웠다.

지난달 27일 새마을부녀회 12개 읍·면 순회 기미독립선언문 배포 릴레이 리허설을 시작으로 3월 4일 금일·생일·금당, 6일 고금·약산, 7일 신지, 8일 노화·보길·소안, 12일 완도·청산, 13일 군외 순으로 12개 읍·면 배포가 완료됐다. 바닷일이 바쁜 어번기라 독립선언문 배포를 위해 전직 회장들까지 나섰고, 12개 읍·면을 누비는 과정에서 누적 참여인원이 2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금일·생일·금당은 지역에서 선외기 배까지 대절해 주었다는 후문.

애국선열들의 정신이 깃든 독립선언문을 그냥 나눠주기가 그래서 일일이 독립선언문을 끈으로 묶는 그 정성도 어찌 갸륵하지 않다 할 쏘냐. 이들은 3월15일 독립만세 재현 현장에서도 독립선언문 배포와 거리 연극에 참여하며 아무 조건없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나섰던 3·15 독립만세운동의 민초들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했다는 평을 얻었다. 실로 이번 완도 3·15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의 역할이 가장 컸던 숨은 공로자들이었다.
 

완도 3·15독립만세운동 100주년 재현 식전행사는 독립횃불 점화로 시작됐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가치를 계승하고, 국민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국을 연결하는 릴레이 행사였다. 완도군은 독립횃불을 12개 읍·면을 대표하는 군의원들과 청년회장들에게 전달했다. 이것을 이어 받아 학생들이 군민을 대상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또한 소안도 출신 의병대장 이준화 선생 등이 동학군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 4명을 처단하고, 등대 주요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했던 사건을 재현한 ‘당사도 등대 습격 의거’ 연극이 공연돼 이번 100주년 재현행사를 더욱 의미있게 만들었다.

100주년 재현 기념행사 여러 식순 중에서 가장 군중들을 애닳았게 했던 것은 강명진 전자바이올리니스트 선율에 맞춰 성악가 박성경 소프라노의 ‘이별가’ 공연이었다. ‘이별가’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지방부장을 그만두고 민족교육에 전념하는게 자기 할일이라고 소안사립학교 교편을 잡으러 내려온 이시완 선생이 일제에 의해 학교가 강제폐교되자 떠나게 됨에 따라 스스로 작사, 작곡한 노래로 4절 가사가 그대로 한편의 이별편지다. 행사에 참석한 군민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시완 선생은 당시(1920년대) 동아일보 지방부장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소안이라는 곳에서 항일운동 관련 기사가 자기 데스크에 계속 날라들었다. 그것에 감동해 항일운동의 중심지 소안사립학교에 가서 2세 교육에 전념하는 것이 자기 할 일이라고 마음먹고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미지의 땅 소안을 찾았다.

그는 소안에 교사로 부임한 이래 신들린 듯한 열성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로서가 아니라 소안의 애국지사들과 의기투합한 것이었다. 그때 소안사람들은 정구공을 처음 보았고, 테니스란 운동을 처음 알았다. 그는 체육에도 뛰어났고 정도 많았었다. 그러나 학교 강제폐쇄의 날이 오자 그는 자작곡(이별가)를 부르며 눈물로 소안부두를 떠나야만 했다.

이별가 노래 가사에는 이시완 선생의 애절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큰뜻을 품고 내려온 결의와 내려와 소안도 사람들과 맺은 정 등을 떠나가는 부두가, 배에서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의 일이 한바탕 꿈결 같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교육자답게 (꽃송이)후세들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떠난다 떠나간다 나는 가노라 / 세월의 꽃동무를 남겨 두고서 / 쌍죽에 맺은 마음 굳고 깊건만 / 내 분을 못이겨서 나는 가노라(1절)

만남도 뜻 있으니 믿음도 큰데 / 마음 속에 맺은 정을 풀기도 전에 / 이별로 애를 끊는, 이 왠일인가 / 눈물이 앞을 가려 말못하겠네(2절)

한바다 외배 타고 돌아서는 맘 / 지난 일을 생각하니 꿈결 같도다 / 뒤로는 웃고 놀던 소안 뜰이며 / 앞으로는 바라보니 험악한 파도(3절)

소안의 뭉게뭉게 피는 꽃송아 / 한말씀 드리노니 새겨두시오 / 아무리 악풍 폭우 심할지라도 / 임향한 일편단심 변치 마시오(4절)

 

이날 완도 3·15독립만세운동 100주년 재현행사 기념식은 독립운동 후손이 기미 독립선언문을 직접 한글자, 한글자 새겨 제작한 대형 한반도 지도가 해조류센터 건물에 펼쳐지면서 끝을 맺었고, 이후 가두행진이 이어졌다.

같은 날 1998년 설립했으나 2000년 ‘완도군항일운동사’를 발간하고 지금은 활동이 거의 유명무실해진 (사)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 재건의 뜻을 가진 독립유공자 후손과 여러 읍·면의 항일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 등이 이번 100주년을 계기로 사전 모임을 가지고 단체 ‘재건’에 뜻을 모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