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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색, 찬연한 빛을 껴안다

[리더스] 김종숙 서양화가 / 향우(청산면 출신)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8.10.12 15:35
  • 수정 2018.10.1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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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소멸하는 것들의 목덜미를 번개처럼 나꿔 채 그것을 형상이라는 선명의 제단 위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화폭에 닿는 순간, 지속하는 소멸적 계기와 스러져 가는 재귀적 계기를 밝혀주는 이 비밀스럽고 신령한 힘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보는 순간, 살아서 꿈틀꿈틀거리는 이 추동하는 에너지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우주를 탄생시킨 쉼없는 생명력으로 매순간 번쩍이는 섬광을 만나는 사람, 화가 김종숙.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새색시처럼 보였으나, 1969년생이라고 했다. 청산면 동촌리가 고향이고 남편과 함께 슬하엔 아들 둘.

대한민국 통일미술대전 특선을 비롯해 각종 미술대전 대상과  특선 평론상까지, 대한민국 아트페스티벌(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출품부터 국내외 미술제 출품작 다수, 각종 정기전 13~ㅣ8년과 기타그룹전과 국제전 다수 등 화려한 이력을 선사하고 있다.
작은 아이가 미대를 졸업하고ᆢ조카 2명 모두가  예술분야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유년시절 완도에 대한 기억을 묻자,  그녀는 "글쎄요.ᆢ먹먹하니 어두웠던 기억만 있는 듯. 그땐 숨소리도 제대로 내질 못할만큼 너무나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 칠흑같은 밤에 술 담배 심부름을 가야했던 무서웠던 기억. 딱히 가슴 시린 생각만 떠 오르지만, 바다와 함께하면서 뭍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가난이 욕망을 품게 했고 욕망은 꿈을 키우게 했다"고. "이제는 그 고향이 그림 소재가 되고 그 아픔이 오늘날의 나를 키워냈던 원천임을 알기에 옛날을 자랑스럽게 얘길한다"고 했다.
 


꿈은 가수였는데, 라디오 밖에 없는 시골에서 더 넓은 세계를 들어보지도 못해 그런 꿈을 가졌는데, 늘 밝고 명랑했으며 공부보다는 예체능을 잘했단다.
육상선수였다며 웃는다.

아버지는 문어 어장의 선주로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남겨진 건 빚과 어린 4남매. 중 3인 언니는 고등학교를 다녀야했기에 뭍으로 나갔고 둘째였던 그녀는 엄마를 지키며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ᆢ자존심과 책임감이 강했다고.

그리고 내 안에서 솟구치는 알 수 없는 욕망까지.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우리힘으로 살아가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 졸업 후 대학은 엄두를 못내고 동생들 학비를 보태고 엄마를 보살피고 아버지의 빚을 갚아내야 하는 무게감까지.ᆢ 그 시절이 늘 아련하게 아려온다고.

남편은 고 3 학력고사가 끝나고 미팅에서 만나 엄청나게 귀찮을 정도로 따라 다녀 사귀게 되었고 그때 육사 합격과 동시에 연세대에 합격해 대학생활을 하다가 군대를 가고 제대 두 달을 앞두고 남편은 24살, 그녀는 23살에 결혼을 하게됐단다.ᆢ

파일럿의 꿈을 가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길을 올랐고, 학구적인 남편은 컴퓨터 회계 심리 등등 많은 공부를 하면서 5여년만인 IMF가 터진 1997년 말 귀국하게 되었다고.
지금껏 학비와 생활비, 아이 양육까지 아낌없는 뒷바라지.
또 지병인 당뇨를 가진 시부모님을 위해 보리밥을 따로하여 한 끼 밥상만 3번씩 차리면서 약재물을 올리고 몸에 좋은 간식을 때때로 챙겨야하는 큰 집안살림.
 

 
3대가 함께 부데끼며 살아가면서 정작 자신의 인생은 없어지고, 특히나 시댁은 대구 출신의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가정에 며느리에 아내 올케 엄마 역할까지 정말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로  점점 우울증에 시달렸단다.

"앞날이 이렇게 끝날 것만 같았죠" 눈물로 보내던 시간.
소위ᆢ학벌과 집안에선 너무 뒤쳐지는 친정.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걸 깨닫게되고 마음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은 자신을 더 우울하게 했다고.

그때 남편이 선물로 준 중대 산업대학원을 다니게 되고 국제무역실무를 2년 수료했단다.
천성이 순종적이고 부모님에게 효행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건 아버지없이 홀로 된 엄마를 욕되이 할 수 없어 얼마나 노력하며 순종해 왔던가!ᆢ

그러다 드디어 2006년 6월.
반기를 들어 독립하게되면서숨통이 트이는 삶을 살게됐단다.
의상디자이너가 더 하고 싶었으나 그림을 접하면서 소질과 감각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터라, 섬소녀의 당찬 깡다구(?)로 고흐만큼 되보겠다는 일념으로 1년 12달을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면  1점씩 완성작을 올리던 시절을 보냈단다.ㆍ
그 후 리듬이 무너져 몸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약까지 복용하며ᆢ호된 교훈을 얻어야 했던 시간들이 오늘을 있게 했다고.

그녀는 색으로 사유하는 자.
그녀가 바라보는 화폭은 표면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붓놀림에는 무수한 빛감들이 쉼없이 번쩍거린다. 찍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닌 찍히는 순간 태어나는 고결한 생명성.
매 순간 생명의 빛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찬연한 그 빛을 껴안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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