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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보다 '유PD'가 더 어울리는 남자

[이 사람] 완도홍보는 내손에! 완도군청 문화체육과 유영인 미디어홍보담당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8.08.24 10:07
  • 수정 2018.08.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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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홍보의 대명사, 완도군청 문화체육과 유영인 주무관.


『사기(史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에 '낭중지추(囊中之錐)'란 고사성어가 나온다.
조(趙)나라 공자 평원군은 평소 선비를 후하게 대해 수천 명의 식객이 있었다. 어느 날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평원군을 보내 초나라에 도움을 청하도록 하였다.

평원군은 식객과 제자 중 용맹하고 학식 있는 20명을 선발하여 가려고 했다. 마지막 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있을 때 모수(毛遂)라는 이가 스스로를 추천하며 앞으로 나왔다.

평원군은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夫賢士之處世也, 譬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라고 하며 빈객으로 있은 지 3년이나 되었으나 들은 적 없는 모수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모수는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저를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했더라면 그 끝만이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하였다. 결국 모수는 일행에 가담하여 함께 초나라로 갔고 초나라와의 교섭에 큰 활약을 하였다.

‘낭중지추’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어도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임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런데 완도군청 문화체육과 유영인 미디어홍보담당 주무관을 보면 ‘낭중지추’가 생각난다. 낭중지추의 고사성어 이야기 속 일찍 뽑아 쓴‘모수’와 같이 말이다.

그는 이야기꾼이자 다큐 사진작가이고, 책을 쓰는 저술가이며, 누구를 만나든 상대를 현혹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완도군 홍보에서 두각을 나타내 ‘유기자’‘마당발’‘유PD’‘유박사’ 등 다양한 별칭으로 그를 부르게 만들었다. 모두 홍보쪽에서 근무를 오래하다 보니 주변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들이다. 현재 유PD는 2010년부터 많이 불리는 애칭인데 주로 영상 홍보를 많이 하다 보니 프로듀서와 비교하여 유피디로 널리 불리어 졌다고 한다. 

그에겐 홍보가 천직이었던 모양이다. 완도에서 30여년의 공직생활 중 20여년을 홍보분야에서 근무했던 것이 “여건이 불리하거나 몹시 어려울 때도 누가 알아주든, 안알아주든 우리 군을 홍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게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저없이 말이 나온 걸 보면.

슬쩍 미디어홍보 분야에서 일하려면 완도를 찾는 기자들을 잘 구워 삶아야 되는데 그 비법이 뭐냐고 물으니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특별한 비법이라기 보다는 여러 방면의 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 완도를 취재 오는 기자들에게 완도의 구석구석은 기본이고 인물, 역사, 자연 등 궁금한 문제를 막힘없이 해결했다. 또한 만나는 기자들과 이야기가 잘 통하려면 다양한 분야에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했다. 쉽게 말해 공통분모를 찾아 누구하고나 이야기를 하더라도 동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 일은 참 쉬운 일이면서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부산 출신의 기자나 피디를 만난다면 부산에 관한 몇가지의 이야기는 기본이고 그 사람의 취미를 안다면 거기에 맞춰서 이야기 한다. 자기 코드에 맞춰 이야기하는데 안 좋아 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
 


유PD로 불릴만한 명불허전의 자기자랑도 좀 부탁했다.
“지난 2010년 우리나라 최초로 영상미디어팀이 만들어졌다, 잠시 외유가 있었지만 그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내 분야에서 만큼은『No』라는 말은 없다. 요즘은 방송 섭외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어선임차비나 재료비를 지원해 줘도 출연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열심히 한다, 더하기가 안 될 때는 빼기를 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해결한다. 공중파와 종편 방송을 통해 매년 80~90회 정도 TV 프로그램을 유치하여 다양하게 홍보를 하고 있는데 올해는 매생이와 전복 홍보를 중점적으로 하였다. 특히 상반기를 넘기고 있는데 벌써 70여회를 넘는 방송을 유치하여 우리군을 홍보했다” 

워낙 출중하다보니 그럴까. ‘괴짜’ 공무원으로 밖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그였는데, 공무원 되기 전에도 남달랐다.   
“공무원을 하기 전 막일(속칭 노가다)을 했다. 고향 강진에서『봉황판유리』라는 상호를 내걸고 페인트와 유리를 판매하거나 소규모 공사를 맡아 했는데 나이도 어린데다 귀가 얇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또한 막일판이 매우 억센 곳이어서 행동이나 말이 거칠 수 밖에 없었는데 재미를 붙이지 못해 결국 그만 둔 후 우연치 않게 공무원이 됐다.” 

그의 공직생활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4천여명의 어르신들에게 영정사진을 찍어 드린 거라고 한다.
“영정사진은 홍보계에서 근무할 때 군정 시책의 일환이었다. 그때가 1990년 가을이었다. 관내에 244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거의 모든 마을을 순회하며 정확하게 4,327명의 관내 노인들에게 영정 사진을 찍어 드렸다. 도서지역 노인들이 돌아가실 때 영정 사진이 없어 안타까울 때가 많았는데 누군가의 마지막에 보일 단정한 모습을 촬영할 때 가슴이 뿌듯하였다. 공무원 생활 중 아주 보람 된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워낙에 미디어홍보의 고수라 불린 그이지만 완도문화에도 관심이 많은 그이다.
“완도군은 다른 곳에 비해 지역문화가 매우 약하다, 최근에 뜻이 있는 몇 분이 모여 문화원 부설로『완도향토사연구회』를 발족하고 지역의 문화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전공을 살려 문화전문가로서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카카오 톡에도 엄청난 책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 놓은 그였다. 궁금해서 이유를 물었다.
“기자라서 별것을 다보고 다닌다,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고 평소 읽던 책을 모으니 대략 2500여권의 책을 보유하게 됐다.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易說乎(불역열호)아.....』는 논어 학이 편에 나오는 말인데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한번은 아주 친한 지인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술 마실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 책은 언제 읽는다고 이렇게 전시를 해 놓느냐고 핀잔을 준적이 있다. 책 읽는 것을 남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단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다, 잡지를 읽더라도 읽는다“

책을 좋아하다보니 에피소드도 많았단다. “하나는 공무원 인사철이나 연말이 되면 집이 엄청 어질러지는 것이다. 이유는 군청에서 버려지는 책을 일단 모두 주어온다, 그리고 읽을 것과 버릴 것을 분리한다.

또다른 에피소드는 수산 관련 책을 수백권 모은 적이 있는데 집사람이 몇 권을 제외하고 거의 버렸다, 이유는 정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진시황제도 아닌데 왜 분서갱유를 했냐고 대판 싸웠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중반 딸들과 함께 일본의 간사이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오사카에서 우연히 헌책방에 들르게 됐다, 마음에 드는 책을 10여권 이상 사니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아 귀국길에 엄청 고생 한 적이 있다“   

또한 상당 수의 완도군의 서적이 그의 손을 통해 발간됐다.
“1992년 『완도군정 50년사』라는 책을 처음 편집하였다, 이후 연설문집이나 우리군의 읍면지 편집 자문을 몇 군데 해준 적이 있다. 특히 2010년 개정판 완도군지를 총괄 편집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모두 손 놓고 있을 때 약 1년간에 걸쳐 홀로 고군분투하며 편집하고 수정하여 미흡하지만 발간 할 수 있었다”

남들로부터 ‘홍보의 달인’이라고 불리지만 후회도 있었단다. “인생에서 후회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아이 입양』이다, 2005년에 아이를 입양할려고 알아보았다, 그때가 입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양부모의 나이가 45세가 되면 입양이 어렵다)였는데 나의 계획과 달리 뜻 밖에 가족들이 반대하여 입양하지 못했다, 그때 밀어붙이지 못한 게 지금도 조금 후회가 된다, 나는 입양이 우리 사회에 대한 커다란 봉사라고 생각한다. 환경이 어려운 고아를 훌륭하게 키워 떳떳하게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한다면 얼나마 뿌듯한 일인가?”

마지막으로 남은 공직생활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물었다.
“현재 진행형인 『완도의 해녀들』과 『완도의 마을 숲과 나무』를 발간하는데 힘쓰고, 2년 반 정도 남은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치는 것도 목표이다. 또한 우리지역의 향토사를 재 정비할 필요가 있어 은퇴 후에는 향토사 재정비에 매진 할 계획이다. 특히 전공을 살려 지역의 문화 발전을 위해서 봉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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