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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필수 진상품, 탐관오리에게 착취 당하기도

[노화읍 특집] 3. 문헌 속 전복이야기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8.08.24 09:44
  • 수정 2018.08.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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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복(全鰒)에 관한 문헌기록 중에서 완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중국의 진시황이 서복(徐福)이라는 인물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고, 전복을 구하러 서복이 다녀간 곳이 서귀포(西歸浦)라는 이야기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에서 저술한 <자산어보>에는 전복을 복어(鰒魚)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살코기는 맛이 달아서 날로 먹어도 좋고 익혀 먹어도 좋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말려서 포를 만들어 먹는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는 이야기다.

이 외에도 문헌상 전복에 대한 기록은 굉장히 많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 155-220)는 평소에 전복을 좋아했다. 조조가 죽은 후 셋째 아들인 조식이 부친을 추모하여 바친 글 “구제선주표(求祭先主表)”에서 선주 즉 돌아가신 임금인 부친 조조가 전복을 무척 좋아해서 자신이 서주(徐州)의 자사(刺史)로 근무할 때 전복을 200개나 구해서 바쳤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둘째 조비(曹丕)는 오(吳)왕 손권(孫權)에게 황제의 위업을 과시하는 한편 유화책으로 엄청난 선물을 보냈는데 여기에 전복 1000개가 포함되어 있다는 기록이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기록돼 있다.

한서(漢書)인 “왕망열전(王莽列傳)”에는 1세기 때 한나라에 이어 신(新)나라를 세우고 황제된 왕망이 걱정이 심하여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고 음식은 아예 삼키질 못했다. 다만 유일하게 입에 댄 음식이 전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미식가로 유명한 소동파(蘇東坡)는 전복을 먹고 그 맛에 반해 ‘전복의 노래’라는 뜻의 ”복어행(鰒魚行)“이라는 시를 남겼다. ‘고기와 영지, 석이버섯 요리 수는 많지만/식초 바른 전복 회 껍데기 속을 장식하니/귀인들이 그 맛을 진귀하게 여기는데/기름 살짝 바르면 맛이 더욱 오래 간다네’라고 노래했고, 소동파는 전복 중에서도 맛있기로는 발해만(渤海灣)에서 잡히는 전복이 으뜸이라 했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 장군이자 황제의 사위인‘저언회(楮彦回)’는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청렴결백에 가난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전복 30마리가 생기자 주위에서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태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친지들을 불러 다 먹어 치웠다. 라고 남사(南史)의 <청백리열전(淸白吏列傳)>에 나온다.

17세기 명나라 때 발행된 <오잡조(五雜粗)>라는 문헌에 중국의 세도가나 부자들의 장수와 기호품에 음식에 남방 굴, 북방의 곰발바닥, 서역의 말젓 그리고 동방의 전복을 꼽고 있으나 네 가지 공히 당시에는 구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질 좋은 아발론 펄(abalone pearl)이 나온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 기록에도 전복은 꽤 자주 등장한다.

선조 때 세자의 스승을 지낸 유몽인(柳夢寅)은 야참으로 임금님이 하사한 전복 한 접시를 들고 ‘하늘나라의 진수성찬을 내어주신 임금님 총애에 눈물로 갓끈을 적신다.’라고 노래했다.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산 임금이 18세기에 팔십 삼세의 수를 누린 영조(英祖)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복통, 소화불량에 시달린 영조의 짧은 입을 달래준 것이 전복과 송이 그리고 고추장이라고 했다고 남아 있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송시열(宋時烈)이 전복 따는 과정을 기록에 남겼는데 어민들이 전복을 채취할 때는 목숨을 내놓고 깊이가 100길이나 되는 바닷물에 들어가는데 재수가 좋으면 한두 개 따올 뿐이고, 사람마저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했다.

세종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기건(奇虔)’같은 이는 아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제주 목사(牧使)시절 어민들의 물질하는 고생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진상품 품목이 적힌 <공선전례>(1776)와 <만기요람>(1808)에는 생복과 말린 전복을 진상한 기록이 나온다. <이조궁정요리통고>에도 최고의 음식으로 생복찜이 등장한다.

<귀합총서>에는 패각에 있는 호흡공은 눈을 밝혀주며 간 동열에 의한 성맹, 내장이나 골증 치료에도 좋다고 기록돼 있다.

예부터 고임상에서 말린 전복은 마른 어물, 포와 함께 가장 화려하게 쓰였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엔 말린 전복으로 무엇을 하든지 안 좋은 것이 없다 했다.

희대의 간신인 유자광은 1499년 연산군에게 생전복을 사사롭게 채취해서 바쳤다는 이유로 탄핵의 대상이 됐다. 연산군은 “유자광이 날 위해 바친 것인데 무슨 문제냐”고 ‘꽁’했다. 6년 뒤인 1505년, 연산군은 유자광 탄핵에 나섰던 사간원 관리들을 색출해서 곤장 70~80대를 치는 복수극을 펼쳤다. 연산군의 뒤끝이 제대로 작렬한 ‘전복 탄핵 사건’의 전말이다.

<탐라지(耽羅志)>에는 제주도에서 전복이 말(馬), 감귤과 함께 임금께 진상하는 공물 중의 하나로 기록돼 있고, <제주풍토기>에는 ‘해녀들이 갖은 고생을 하면서 전복을 따지만 탐관오리의 등쌀에 거의 뜯기고 스스로는 굶주림에 허덕인다.’라고 적어 관리들의 전복 갈취 행위가 심각했음을 보여주었다.

정조 임금은 여러 차례 “전복을 캐려고 애쓰는 모습을 생각하니 고통스럽다”면서 전복의 진상을 대폭 줄이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전복을 짝사랑의 상징으로 여겼다. 전복은 다른 조개와 달리 껍데기가 한 쪽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고대 시집 <만엽집>에는 "어부가 날마다 잡아 올리는 전복 껍데기처럼 내 사랑도 날마다 짝사랑" 이라는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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