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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옛님은 아니뵈고, 갈꽃만 날리네

[노화읍 특집] 2. 가볼만한 명소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8.08.24 09:22
  • 수정 2018.08.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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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오는 노록도 '신비의 바닷길'

노록도 ‘신비의 바닷길’
1km 길이, 1년에 몇번 영등살 때 나타나

노화읍 당산리에는 바로 앞의 노록도와 연결되는 ‘신비의 바닷길’이 1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평소에는 바닥을 감추고 있다가 1년에 몇 번 영등살 때면 나타나는 신비의 길이다.
이곳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 노록도에 사슴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노록도의 사슴들이 전부 노화도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 중 늙은 사슴 한 마리만 헤엄칠 힘이 없어 노록도에 남게 되었는데,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노화도로 건너갈 수 있게끔 용왕신에게 간절히 빌자, 이에 용왕신은 늙은 사슴이 노화도로 건너갈 수 있게끔 바다를 갈라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기력이 쇠진한 늙은 사슴이 미처 바다를 다 건너오지 못하고 도중에 바닷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은 노화 당산리 바다 건너 노록도에는 수사슴이 한 마리 살고 있었다. 이 사슴은 당산리에 살고 있는 암사슴을 만나기 위해 당산리로 향했다. 그러나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바닷길을 건너다 죽었다라는 내용이다. 
노록도는 노루섬이라고 불리우는데, 노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섬의 생김새가 풍수지리상의 노루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바닷길이 열리면 바지락, 고막, 낙지, 소라 등을 잡을 수 있다.

 

고산 윤선도가 간척하며 만들었다는 석중리 저수지 모습.

송원두·석중리 저수지 제방과 설씨부인 묘지터
고산 윤선도 관련된 흔적 노화 곳곳에

고산 윤선도와 관련된 흔적은 보길도 뿐만 아니라 노화 곳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노화 송원두마을의 서쪽에 있는 제방과 석중저수지 제방은 윤선도가 간척과 아울러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송원두 제방의 길이는 약 320m이고, 저수지를 제외한 간척 논 면적은 약 60정보이며, ‘석중리들’이라 칭한다. 석중저수지 제방 길이는 약 160m이고, 면적은 약 4천 평이다. 저수지의 위쪽에 있는 답을 일부 확장하였으나 옛형태가 매우 잘 보존되고 있다. 조선시대 간척과 저수지를 살펴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생각된다. 현재 저수지 안으로 내만한 땅에는 마을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특히 석중리 마을 뒷산에는 고산 선생의 부인인 설씨 묘가 실재했다. 10여년 전 해남 윤씨 문중에서 묘를 이장해 가 현재는 터만 볼 수 있다.
 

노화에는 동양 최대의 납석광산이 있다.

동양 최대의 납석광산
일제 때 광산 개발 시작…주민 수난도

노화도는 한국의 대표적인 납석 광산이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처음 허가가 난 지역은 노화면 구석리였다. 일본회사 나카무라조에게 5년 동안 구석리에서 납석을 채취하는 것이 허가됐다. 납석은 내화재(불에 타지 아니하고 잘 견딜 수 있는 재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제조하는 중요한 원료였다.
납석 외에도 살충제인 DDT의 원료인 ‘파이로 피라이트’도 노화도에서 채굴돼 외국으로 실려 나갔다. 노화도의 광산업은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노화도에는 납석을 생산하는 광산은 크게 두 곳이다. 하나는 ‘노화광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완도광산’이다. ‘노화광산’의 경우 해남 황산 출신 조선내화(주) 이훈동 사장이 8·15 해방과 더불어 정부가 일본인으로부터 환수한 재산을 매각하는 가운데 화신백화점 박흥식 소유의 ‘노화광산’을 매입해 운영한 곳이다.
노화도 지역 광산의 지질은 응회암 암맥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응회암은 광구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으며 층리가 발달돼 있다. 광산은 이 응회암의 후기 열수작용을 받아 형성된 납석광산으로 주로 층상으로 발달돼 있다. 노화도의 광산 생산량은 한국에서 3위권에 들 정도로 대규모라고 한다.
노화도에서의 납석 채굴은 갱도를 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천에서 채굴하는 방식이어서 주민들의 환경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광산에 따른 인근 주민들의 피해로 인한 갈등이 이어져 왔는데, 1991년에는 노화광산에 대해 인근 주민들이 집단이주와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노화광산 운영사 측은 주민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맞서, 반년 넘게 분쟁이 계속됐다. 당시 노화광산은 1백여 가구의 구목리 민가와 바로 인근해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과 광산의 거리가 불과 30m밖에 되지 않아 발파 때마다 구들장이 울려 집이 무너질 것 같다는 불안감을 하소연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시대 삼도진 청사가 있었던 도청리 마을회관.

도청리 삼도진 관아 터
조선 삼도진 관아 터, 지금은 마을회관

도청리는 과거 노화도, 보길도, 넙도 등 3도를 관할하던 삼도진 청사가 있던 곳이라 해서 이름지어졌다. 도청 마을의 동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과 동쪽에는 개간지가 넓게 조성돼 있다. 현재 삼도진터에는 마을회관이 건립되어 있는데 건물의 기단부는 삼도진 관아 건물의 기단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삼도진의 설립과 관련된 유적으로 대당 마을 ‘조공강하설진송덕비(趙公康夏設鎭頌德碑)’를 들 수 있다. 이 비에는 1883년 전라감사였던 조강하가 삼도독진을 설치한 후 첨사를 두고 주민을 보호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도진의 설치는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은 후인 고종 20년(1883) 2월 7일 조강하의 보고를 의정부에서 고종에게 아뢰면서 시작됐다. 이러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884년에 주민들은 뜻을 모아 송덕비를 세웠다.
 

대당리 지석묘와 당숲.

대당마을 지석묘군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양식

노화도 대당 마을에서 염등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등산 마을 대당팽나무가 있다.
전언에 의하면, 원래 7기의 지석묘가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를‘칠성바위’라 불렀는데 3기만 남아 있다. 3기 중 1기는 매몰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고, 다른 1기는 도로확장사업으로 인해 이동된 후 당산나무를 둘러싼 석축의 일부로 이용되고 있다. 나머지 1기는 하부구조가 파헤쳐져 석실이 드러나 있는데, 판석과 할석을 사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조사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타제석부와 석도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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