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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항일 의지 하나로 완도-간도 오간 ‘백호장군’[완도 근현대사 인물열전 6] 완도 신지도 항일운동의 또다른 거목 <임재갑 선생>
박주성 기자 | 승인 2017.07.02 10:54
완도 신지도와 간도를 오가며 김좌진 장군 휘하 독립군 무장활동을 전개하며 '백호장군'이라 불렸던 임재갑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도한 송곡 출신 장석천 선생(1904~1935년) 외에 완도 신지면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를 뽑으라고 하면 완도와 간도에서 활약한 임촌 출생의 임재갑 선생(1891~1960년)을 빼놓을 수 없다. 

임재갑 선생은 서울 융희학교에 입학해 민족정신을 깨우쳤으며, 1911년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청년학우회와 구국청년계몽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2년에는 완도 신지에 명신서원을 설립하여 신지도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학문과 국제정세를 가르치며 뜻 맞는 동지를 모아 농촌계몽운동 형태를 빌어 독립운동 정신을 전파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고문을 받고 방면됐다.

흥사단 설립 서울 융희학교 입학 민족정신 깨우쳐
1914부터는 완도의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였던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와 송내호 선생의 추천으로 간도에 있는 용정 대성학원 교원 겸 독립군의 군자금 모금책임자로 활약했으며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부대에서 일본과의 전투에도 여러 번 참여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임재갑 선생 별명이“백호장군”이었다.

1924년 8월 신지학술강습소를 개설, 김재희(金在禧)·송기호(宋琪浩)·김창선(金昌鮮) 등 50여 명의 학생 및 유한단원(流汗團員) 6명과 함께 강연단을 조직하여 신상리·월양리·동좌리 등 면내 6개 부락을 순회하며 주민들에게 한민족의 우수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강연이 끝난 후 혁명가를 부르다가 같은 해 12월 일제 경찰에 피체됐다.

그는 1925년 3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항고하였으나 1925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과 1925년 9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8월 28일 완도읍내 중학원(中學院)에서 신간회(新幹會) 중앙본회 상무 송내호(宋乃浩) 입회하에 완도군 신간회지회(新幹會支會)를 설립하고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많은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체포, 구금, 고문, 투옥을 당했다. 

독립운동 동지 규합 목적 신지 명신서원 설립 주도
임재갑 선생은 1891년 완도군 신지면 신리에서 임영환과 김해 김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신리는 장흥 임씨 문흥공파의 동족마을로, ‘임촌’이라 불리기도 한다. 가계는 부친이 땅이 많아 비교적 윤택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5년 완도에 사립 육영학교가 세워지자 이 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사립 육영학교는 완도군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당시 군수였던 김상섭에 의해 설립됐다. 설립 후 육영학교 운영은 다소 불안정했지만, 1907년 새로 부임한 군수 정긍조가 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학교 운영이 제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육영학교는 해마다 진급시험을 봐서 성적을 주었는데, 1908년도의 진급시험에서는 당시 3학년이었던 임재갑이 우등 다음 등급인 우등급제의 성적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 5월30일와 6월2일자에서 확인된다.

육영학교는 1905년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국권침탈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여 설립된 학교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강한 민족적 색채를 보이고 있었다. 학교 설립 취지에서도 이러한 국가적 존망의 위기감에 기초한 민족적 열망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또 향후 완도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로 성장한 송내호가 당시 2학년으로 임재갑 선생의 1년 후배였고, 고금도 청룡리 출신으로 1920년 고금도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사열이 임재갑 선생과 같은 3학년의 동기생이었다. 따라서 당시 육영학교는 한말~일제초 완도의 항일 민족운동가를 양성한 요람으로서 기능해 왔다. 당연히 이러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에서 이들과 교유하며 보낸 임재갑의 학창시절은 향후 그가 항일 민족운동가의 길을 걷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완도 신지항일운동기념탑의 모습.


이후 임재갑은 육영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가 융희학교에서 소안도 출신 송내호의 1년 후배로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송내호는 1914년 5회 졸업생 명단에서 확인되지만, 임재갑은 이 학교의 졸업생 명단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임재갑은 융희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어 선생은 1914년을 전후해서 고향 신지도로 돌아와 사설 교육기관인 명신학원을 설립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농촌청년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명신학원 수강생이었던 정장언의 증언에 의하면 임재갑은 1914년 신지면 소재지에 명신강습소를 설치한 후 수강생 50여명에게 신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애국행진가 등 민족혼을 일깨우는 노래를 보급하였고, 이 일로 인해 여러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7일 만에 석방됐다. 이 무렵 1913년 소안도의 사립 중화학원을 비롯하여 완도군 내에 여러 신식학교들이 설립되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신지도에서 이러한 교육·계몽활동의 전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소안 송내호 선생 추천으로 간도서 군자금 모금 활약
1920년대 초 선생은 향후 완도지역 항일운동 주역들의 첫 결집체라 할 수 있는 수의위친계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수의위친계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로서, 육영학교를 함께 다녔던 송내호가 주도하여 조직했다. 송내호는 융희학교 졸업 후 서울 중앙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의 중등과정을 졸업한 후 소안도로 내려와 중화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19년 중국 봉천성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의 전라도지단 책임자로 활동하다 검거되어 1년간 복역하였는데, 그는 출옥과 동시에 1922년 소안도를 중심으로 수의위친계를 조직했다. 

수의위친계는 완도 일원과 전라도·경상도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여러 사람들을 파견했다. 1920년대 초반 선생도 소안도의 정남국 등과 함께 간도 용정으로 파견되어 이 지역의 민족운동을 지원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대종교의 세가 강한 간도에서 대종교에 입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3년을 전후해 고향 신지도로 돌아온 선생은 청년회와 교육사업을 주력했다. 마침 1924년 3월, 지난 1년여의 준비 끝에 신지면에 사립 보통학교가 설립됐고 당시 학생수는 약 2백여명에 달했다. 선생은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신지도의 청년 유지로서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신지항일운동기념탑 안내문.

김좌진 장군 휘하 독립군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 참여해 공 세워
그해 10월 군 당국이 이 학교 교원인 임재갑과 송기호를 쫓아내지 않으면 학교를 폐교시키겠다고 위협하자, 교장 황계주가 “원래 신지학교는 무엇보다도 임재갑씨의 열성으로 근근히 유지하여 오는 터인데, 만일 그가 나가게 되면 학교는 군 당국의 철폐를 기다릴 것도 없이 자연히 철폐될 터”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학교 운영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아가 그는 신지청년회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청년회 사업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신지학교 설립 직후 임재갑 등 유지청년들의 발기로 3월25일 신지청년회 정기총회가 개최됐는데, 임재갑의 주도 하에 규칙개정과 임원개선을 통해 청년회를 정비하고, 여러 신규 사업을 확정했다. 

이처럼 당시 34세의 임재갑 선생은 고향 신지도에서 교육사업과 청년회 활동 등을 통해 주민들의 신망을 쌓으며 ‘청년 유지’로서의 위상을 다지는 한편,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그해 8월에는 김재희, 송기호, 김창선 등과 함께 50여명의 신지학교 학생, 6명으로 유한단원으로 구성된 강연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신지면 내 6개 부락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통해 주민들의 자주·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활동에 총독부 당국은 선생과 신지학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적으로 자행했다. 학교가 설립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24년 10월, 당국은 신지학교의 폐교를 압박했다.

신지 면내 6개 부락 순회 강연 후 혁명가 불러 같은해 12월 일경에 피체돼
한걸음 더 나아가 같은 해 11월에는 그해 8월에 있었던 강연회 활동 시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선생과 김재희를 체포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다음해인 1925년 3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에 그는 즉시 항소하였지만, 그해 6월27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27년 2월 전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신간회가 조직됐다. 이후 신간회는 전국에 140여개의 지회와 4만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일본에까지 지회가 조직될 정도로 그 세력이 확대됐다. 완도에서는 1927년 8월28일 완도 읍내 중학원에서 완도군 신간회지회가 설립됐다. 당시 창립총회에서는 오석균의 사회로 박노길의 경과보고와 소안도 출신으로 신간회 중앙본부 상무간사인 송내호의 취지 설명에 이어, 회관 건축 및 기타 사업방침을 토의했다. 그리고 이날 임재갑 선생은 신간회 완도군 지회의 회장으로 선임됐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완도군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아우르면서 이 지역 민족·사회운동의 구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신간회 완도지회의 회장으로 그가 선임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그의 인품과 신망이 완도에서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준다.

1927년 출소 후 완도 신간회 지회장 맡아 활동
하지만 창립 후 신간회 완도지회는 특별히 두드러진 활동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신간회는 4만 회원을 거느릴 만큼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였지만, 조선총독부 경찰당국의 강도 높은 탄압으로 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완도의 경우에는 1927년 10월, 이른바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송내호를 비롯한 소안도의 주요 인물들이 구속됐고, 완도지회의 주요 간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구속된 이들은 당시 신간회를 비롯하여 사상단체와 노동단체 등 완도지역의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해왔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창립 한달 만에 불어닥친 검거선풍으로 신간회 완도지회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완도고보 설립운동 참여했으나 총독부 거부로 끝내 무산
1930년대 선생은 불혹의 나이라는 40세에 접어들었다. 이후 그의 활동은 눈에 띄게 위축됐다.
소안도를 중심으로 한 완도의 저항운동이 그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었기에, 일제의 탄압과 감시도 매우 혹독했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좌절감도 상당히 컸을 것이다. 또 소안도를 중심으로 완도 지역의 저항운동을 주도해 온 송내호·송기호 형제가 일제의 고문과 징역의 후유증으로 1920년대 후반 한창 젊은 나이에 비통하게 눈을 감았다. 비록 동년배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이들 형제의 죽음은 선생에게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국내에서 드러내놓고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 때문인지, 1930년대 임재갑의 활동은 식민지 통치체제 하에서 주민들의 이해를 제한적으로 대변하는 온건한 방식의 활동 정도만이 드러난다. 1934년 완도 읍내에 유치원 설립을 위한 활동과 1936년 완도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특히 완도고보 설립운동에서는 재무부장을 맡아, 본인이 의연금으로 800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완도고보 설립운동은 총독부 당국의 거부로 끝내 무산되었고, 대신 수산학교라도 세우려 했지만 이 또한 성사되지 못했다. 또 1938년에는 완도의 해태집합판매소를 오사카로 이전한다는 설이 나돌자 박인선·이한태·문창주 등 완도의 유지들과 함께 완도군민의 대표로서 도 당국에 이를 막아줄 것을 진정하기도 했다. 나아가 완도 군민들이 이를 막기 위해 해태판매연구회를 만들기로 하자 이의 창립 발기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정치활동 일절 불참...말년엔 광주-신지 오가며 한약방 운영하다 생 마감
선생은 해방 이후 정치활동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좌우 정치세력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면서도 사회주의 세력과도 가까웠던 그가 어느 한쪽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해방 이후 그는 한약방을 하면서 광주와 신지도를 왕래하며 생활하다 1960년 사망했다.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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