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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가리포진 복원사업 본격화되나

완도군, 전남 이순신길 '가리포진' 연장 건의…6월 가리포진 복원 사업 건의·7월 학술세미나 추진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6.02 16:25
  • 수정 2017.08.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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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 호국벨트 이순신길(이순신 백의종군길)에는 조선시대 6개 만호진을 거느렸던 가리포진이 빠져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 당시 완도 가리포진를 방문해 남망산 봉수대에 올라간 기록을 자신의 난중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정걸(25·36대), 이억기(47대), 이순신(54대), 이영남(56대), 최강(59대)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바다를 지킨 영웅들이 첨사로 거쳐간 가리포진 복원사업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완도군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추진되고 있는 2017년부터 5년간 85억원 규모의 ‘묘당도 이충무공 기념공원 조성사업’ 외에 지난 5월말 전남도를 방문해 ‘호국벨트 이순신 길’ 연장을 건의했다. 그동안 전남도의 이순신 길 프로젝트에는 고금 충무사까지만 거치거나 아예 완도는 사업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거기에  고금(충무사)→ 장보고대교→ 완도읍(가리포진)→ 해남(달량진, 해남읍) → 우수영으로 이순신 길이 이어지는 것을 골자로 한 내용을 추가 건의한 것이다.

또한 6월초에는 전남도에 완도읍 일원을 중심으로 가리포진성·가리포 거북선 복원, 탐방로 정비, 남망산 전망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2018년부터 4년간 100억원 규모의 예산이 투입되는 ‘가리포진 복원사업’을 건의할 계획이다.

여기에 완도군은 7월 15일 전에 가리포진 복원사업과 관련한 학술세미나를 추진 중이다. 이에 신우철 군수는 “세미나를 개최해 가리포진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장기적으로 복원하는 계획도 수립해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화답했다.   

최근엔 중앙언론에서도 가리포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해갔다. 지난 6월1일 안영배 전문기자 외 1명의 동아일보 기자가 정유재란을 취재차 완도를 찾았다가 완도문화원 향토사위원회 회원들과 아직 복원되지 않은 가리포진 성터와 전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수군진 객사인 청해관 등을 둘러봤다.  

19세기에 편찬된 광여도 속의 가리포진.(붉은 점선)

 완도 가리포진은 1521년(중중 16)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완도읍 군내리에 설치된 진(鎭)이다. 이듬해 1522년 초대 수군첨절제사 이반(李班)이 부임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우수영의 6개 만호진(회령포·마도·이진·어란·금갑·남도포)을 관장했다. 정걸, 이억기, 이순신, 이영남, 최강 등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걸고 조선의 바다를 지킨 수군 장수들이 모두 가리포 첨사를 거쳐갔다. 이순신장군은 가리포 첨사로 명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1596년 정유재란 당시 남해안을 순시 중에 가리포진성 뒤 남망산 봉수대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앞 바다를 가리키며 "좌우를 살펴본즉 적이 지나는 길과 여러 섬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는 참으로 한 도(道)의 요충지로다"라고 감탄했다는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기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가리포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22년(중종 17년) 5월로 가리포진의 축성에 관한 내용이며, 이로부터 약 2개월 후에 전라도 어사로 파견된 윤지형이 가리포진성의 실상을 보고하고 있다. 

가리포진성의 규모는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동국여지지, 만기요람(1808년), 증보문헌비고(1908년), 호남지(1925년)의 기록은 둘레가 3리(1.2km)로 공통으로 기록돼 있다. 폭은 여지도서(1759년), 증보문헌비고에는 11척이고, 호남지에는 8척으로 나와 있다. 성문은 여지도서는 2개인데 반해 호남지에는 4개로 나와 있는 걸로 보아 원래 2개에서 4개로 증설한 것으로 추측된다.

가리포진에 대한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가리포첨사 선생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리포첨사 선생안은 완도 향교에 보관돼 있는데, 이 책에는 가리포진이 1522년 설진돼 371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내용과 226명의 첨사들에 관해 기록돼 있다. 
 

완도읍 군내리 가리포진 배치도. 객사 바로 앞이 바다였지만, 가리포진성은 일반적인 수군진성과는 달리 산성에 가까웠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가리포진성은 일반적인 수군진성과는 달리 산성에 가깝다. 성터는 도시의 개발과정과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대부분 훼손되고 남벽과 동·서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1918년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지형도를 보면 해안쪽인 북벽구간은 이미 무너지고 성벽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벽은 전 구간이 확인되고 있으며, 동벽과 서벽은 남벽과 연결된 부분에 각각 약 50m 정도가 남아 있는 상태다.

성내의 건물은 1925년 편찬된 '호남지'에 기록이 보이는데 객사로 이용되었던 청해관, 동헌, 내아, 책실, 향사당, 연청, 형청, 관청, 서청, 훈련청, 장청, 통인청, 교방청, 군기청이 있었다. 같은 기록에 가리포진성에는 청해루, 남문루, 동문루, 북문루, 서문루 등 누각형태의 4대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존하는 수군진 객사 중 유일한 완도 가리포진 객사 청해관. 지난 5월 31일 전라남도 이순신연구소 노기욱 박사가 완도문화원 향토사위원회 회원들과 학술세미나와 관련한 답사를 진행했다.

가리포진성의 현존하는 건물로는 객사였던 청해관이 남아 있다. 청해관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수군진 유적 객사로는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가리포첨사 선생안'에 의하면 청해관은 조선 1722년(경종 2년) 가리포진 124대 첨사 이형이 창건하여 궐패를 모셔놓고 삭망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를 올리던 곳이다. 그후 1869년(고종 6년) 가리포진 204대 첨사 이위소가 중수하였으며, 외삼문의 중앙에 걸려 있는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이라는 현판 글씨는 1854년 5월 19일(철종 5년) 가리포진 196대 첨사 홍선이 썼다. 이 객사 건물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로 지정돼 있으며, 1988년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 완도군청 건물은 당시 동헌 등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가리포진에는 전선 1척, 귀선(거북선) 1척, 병선 2척, 방선 2척, 사후선 4척 등 10척의 선박과 445명의 수군이 근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강진현읍지'(1895년) 진도조에 확인되고 있다. 폐진 무렵 기록이라 을묘왜변이나 임진왜란 등 전성기 때는 수군의 숫자가 더 많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1918년 가리포진 부근 지형도. 지도형도를 보면 해안쪽인 북벽구간은 이미 무너지고 성벽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가리포진 복원사업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되자 가장 반기는 곳은 완도문화원이다. 완도문화원은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약 8개월간 적극적으로 가리포진 복원을 제기해 왔다. 완도문화원 정영래 원장은 “가리포진의 역사는 약400년으로 장보고대사의 청해진 역사보다 더 길다. 그런데 우리가 장보고대사만 중요시하다보니 또다른 중요한 완도의 역사인 가리포진을 잊어 먹고 있었다”면서 “앞으로 가리포진 재조명과 복원사업이 잘 진행돼 망각된 역사를 되살리고, 완도읍도 이런 문화자원을 바탕으로 더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고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그동안 완도문화원은 회원들의 가리포진 성터와 객사 답사, 지역향토사와 문화에 관한 정보공유와 유적지 복원·관리 등에 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한 향토사연구회 발족, 해남 남창 달량진성 답사, 진도 남도진(석)성 답사,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방문, 전라남도 이순신연구소 노기욱 교수 완도 초청 등의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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