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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 반지 하나 다시 해주믄 안 쓰까잉!

세상을 만드는 손- 선순자

  • 한정화 기자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11.25 15:09
  • 수정 2016.11.2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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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순자 씨의 손

참 좋은 늦가을날이었다. 11월 중순을 넘겨 추워도 마땅한데 그날따라 바람도 추위도 물러가고 두툼한 외투가 오히려 더울 정도로 따뜻하고 맑았다.

면 승격 30주년을 맞아 온 마을이 축제분위기로 흥겨운 금당면에서 순자 씨를 만났다. 행사장인 금당중학교 운동장 앞쪽엔 화려한 무대가 마련돼 있었고 옆쪽으로는 금당면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옛 사진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하늘엔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운동장 뒤쪽 마을별로 주민들이 모여 있는 천막 앞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어디가 편찮으신지 묻자 싫은 내색 없이 대답해준다. 48세 때 풍이 와 왼쪽이 마비된 후 오른쪽만 쓰다보니 무리가 돼 양쪽 무릎이 상했다고, 오른쪽은 세 번이나 왼쪽은 두 번이나 무릎 연골 수술을 했지만 낫지를 않아 혼자서는 움직이기기가 힘들다고 한다.

장흥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시집온 선순자 씨(사진). 그 시절 중매라 신랑 얼굴도 못 본 채 결혼

했지만 “첨에 봤을 때도 맘에 들었어. 지금도 맘에 들어” 하며 부부의 정을 자랑한다. 다만,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없는 형편이라 혼수를 못 해갔다는 이유로 결혼 초 쏟아지는 시어머니의 미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간 적이 있었다. 장흥 친정으로 갔다가 상경해버린 순자 씨를 끝까지 따라와 놓치 않은 남편의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사는 것.

서울살이 30년. 말도 못할 고생이 많았다. 이라크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남편은 건설 현장을 떠돌았고 순자 씨는 홀로 자식들을 키우다시피 해야했다. 무엇보다 마음 아팠던 건 사춘기를 겪던 큰아들이 다쳤는데도 치료비가 없었을 때……. 남편은 그때도 외국에 있었고 결국 결혼 반지를 팔아 치료비를 마련했다는 순자 씨. 그래도 잘 커준 자식들이 고맙고 지금은 늘 곁에서 손발이 되어주는 남편이 고맙고 하루하루가 고맙다.

그녀에게도 나라 걱정은 태산이다. "망했제. 어쩜 조으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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