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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덕 “세월은 가슴 속 무덤도 다독이며 간다”

이 사람

  • 한정화 기자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11.25 11:25
  • 수정 2016.11.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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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처럼 임희숙의 노래 ‘진정 난 몰랐네’처럼 우리는 정말 모르고 산다. 5년 후, 혹은 10년 후 내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살다가 전라남도 완도, 땅끝마을보다 더 먼 땅끝까지 와 살게 될 줄을 그녀도 정말 몰랐다.
완도에 오게 된 지 이제 10년째 접어든 고순덕 씨(사진).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 까마득한 듯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40~50대 정년퇴직, 50~60대에도 일하고 있으면 도둑이라는 뜻. 97년 IMF 외환 위기 이후 ‘평생직장’이라는 신화가 깨지면서 생겼던 말들이다. IMF 사태로 숱한 사람들이 삶의 굴곡을 만났고 끝내 이겨내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그녀의 삶도 그 굴곡을 피하지는 못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어진 남편의 사업을 접고 부부는 고향 전주를 떠나 진안으로 들어갔다. 진안은 말 귀의 모습을 닮은 마이산으로 유명한 산촌. 마이산의 탑사나 여름날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능소화가 멋진 곳이다. 읍내에서 어렵게 전전세로 가게를 얻어 작은 식당을 시작했다. 갈비와 김치찌개를 주메뉴로 배달도 하며 죽어라 일하는 사이 차츰 입소문이 나고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시장 안에 가게 자리가 났다고, 그 솜씨면 성공할 것이니 옮겨보라고 권했다. 성공이라는 말에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시장 안으로 들어가서는 감자탕집을 시작했는데 잘 안 됐다. 옆 가게 사장의 조언을 얻어 내장국밥으로 바꿨다. 생전 처음 보는 내장인지라 어디가 먹는 부위인지 어디가 못 먹는 부위인지 그야말로 천지 분간이 안 되는 지경. 열심히 배워가며 내장을 썰었다. 내장을 썰며 곰곰 생각하니 장날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나온다.

“지금이야 치과도 많이들 다니지만 그때야 그랬나? 이가 빠져 없거나 아프거나 그랬지뭐.” 그래서 생각한 게 어르신들이 드시기 좋게 내장을 푹 삶는 것이었다. 푹 삶은 내장국밥이 또 슬슬 입소문이 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한 그릇에 3천원 하던 국밥을 장날 하루에 200 그릇 넘게 파는 날도 있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이 궁리 저 궁리 시행착오를 겪으며 함께 뛰었다.

그렇게 8년을 진안에서 버티다가 이래저래 모아진 돈 5천만원을 손에 쥐고 순덕 씨 부부는 다시 고향 전주로 돌아와 진안에서 실패했었던 감자탕을 시작했다. 전북대학교 근처 광장 앞에 문을 연 감자탕집은 이번엔 성공이었다. 24시 감자탕집으로 제대로 자리잡았다. 그때를 회상하면 어떻게 그렇게 일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까마득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말도 마, 2002년 월드컵 때 응원한다고 광장에 모여든 그 많은 사람들…….”

가게가 안정이 되고 돈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기만 했다면 그녀가 지금 여기 완도에 있었을까? “돈좀 모인다 싶으면 사업한다고 남편이 쏠쏠 빼갔지 뭐.” 그러던 차에 남편이 완도로 가게 됐다. 지인이 있어 여행을 떠난 것인데 그 길로 남편이 완도에 눌러앉아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낚시하는 재미에, 무엇보다 완도의 풍광에 푹 빠진 남편은 헤어나질 못했다. 결국 남편은 완도에서 순덕 씨는 그대로 전주에서 떨어져 살았다. 설마 완도의 빼어난 자태에 남편을 빼앗길 줄 그녀는 진정 몰랐으리라.

“나는 안 간다. 절대 못 간다”
5년을 버티다가 결국 그녀도 완도로 오게 됐다. 처음엔 다시 전주로 돌아가려 했다. 경치가 좋은 것이야 경치일 뿐이고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 같은 삶이 모든 게 낯선 환경에서 오죽했을까. 게다가 완도 온 지 얼마 안 돼 큰아들이 스물 아홉 창창한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서울 살던 큰아들이 바로 한 해 전 결혼해 신혼여행을 완도로 왔었는데 그것이 순덕 씨 모자의 마지막 여행이 되어버렸다. 얼마 후 그녀의 친정 엄마도 세상을 떠나셨다. 우울한 날들이었다…….

주저앉을 순덕 씨가 아니었다. 목욕탕을 다니며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오후에 갈 때는 사람이 별로 없어 오전에 다니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말동무 할 이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둘도 없는 친구도 생겼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연 없는 사람 없더라는 순덕 씨. 내 사연 털어놓으려다 어느 새 상대의 사연을 들어주게 된다고,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고. “이제 괜찮아.” 괜찮다고 미소까지 보이지만 괜찮은 것보다 괜찮아지려고 다독이고 또 다독여왔을 그녀의 시간이 엿보였다.

그런가 보다. 사람은 저마다 가슴 속에 무덤 하나씩은 품고 사나 보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오히려 잘 다독이고 돌봐야 탈이 안 나는 마음의 상처.

결혼해 목포에 사는 아들과 서울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딸, 해병대 중사로 김포에 있는 막내, 무엇보다 이날까지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을 주는 남편. 그녀의 가정은 화목하다. 사는 데 그게 제일이라고 말한다. 

평생 해 온 일을 손 놓고 있을 그녀도 아니었다. 감자탕집에서 반찬가게로 지금은 작은 국밥집을 하고 있었다. 낼모레면 환갑이라는 순덕 씨. 이제는 악착같이 돈을 벌 생각보다도 사람들 만나는 재미로 일한다.
순덕 씨는 완도를 떠날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 완도엔 ‘정’이 있다고 한다. 완도만큼 편견 없고 어떤 지역에서 온 사람이건 마음으로 잘 안아주는 지역도 없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됐을 때 가슴 깊이 묻어둔, 하도 깊게 묻어서 꺼내기도 힘든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나오는 때가 있다. 그날 그녀와의 만남이 그러한 때였다.
함께 웃다가 함께 눈시울도 붉어지는 가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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