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에게도 농어의 피가 흐르고 있소

김숙희(완도 빙그레식당 대표)

  • 김숙희 wandopia@daum.net
  • 입력 2015.03.12 09:25
  • 수정 2015.11.04 16:53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월이 지나서 바닷물이 차가와지면 바닷것들은 싱싱하고 건강해진다. 믈살이 세지고 바닷물의 수온이 낮아지는 약간의 고난이 오히려 생선에게는 이로운 모양이다. 생선의 맛이 훨씬 깊어지고 고소해진다.

완도 근해에서 많이 건져 올리는 쏨팽이, 우럭, 도미, 삼치, 농어 등은 우리집에서 주로 구워 나가는 생선의 이름들이다. 볼수록 참 귀티나고 예쁜 참돔은 내 생각에 생선의 미스코리아다. 몸무게가 제법 나가고 쭈욱 뻗은 삼치는 한국통신 선전을 응용하면 "잘 생겼다. 잘 생겼다. 삼치! 와 크다."

크든 작든 제맛을 가지고 있어서 완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생선은 "쏨팽이"가 아닐까. 매운탕을 끓여도, 지리를 끓여도, 생선구이를 해먹어도 비린내가 나지 않고 담백한 쏨팽이는 가시가 많아 조금 불편한 점을 빼고는 흠잡을 데가 없는 생선이다. 그래서인지 손님 중에 예약을 하면서 "쏨팽이 좀 많이 구워주세요"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생선 중에 껄떡이라고 부르는 고기가 있다. 농어새끼의 이름인데 맛이 별로다. 그래서인지 껄떡은 농어보다 훨씬 값이 싸고 맛이 덜하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껄떡도 제법 맛이 있다. 껄떡을 구워 밥을 먹으면서 "어, 그래도 생각보다 맛이 있네" 했더니 옆에 있던 남동생이 "나에게도 농어의 피가 흐르고 있소"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우리는 모두 박장대소했다,

남동생은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말에 묘한 장난끼가 어려있고 또 의미가 있는 말들을 재치있게 잘한다. 보기에는 유머와 상관없이 생겼지만 어찌나 유머러스한지 일하는 우리에게 엔돌핀이 될 때가 많다.

언젠가는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던 도미를 꺼내어 손질하다가 비늘도 잘 벗겨지지 않고 깨끗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짜증난 목소리로 "어휴! 다 똑 같은 생선인데 왜 냉동실에 보관한 생선은 이렇게 지저분하냐?" 했더니 남동생 왈, "그것도 모르요. 목욕을 안 해서 그렇지." 듣고 있던 우리 모두 "와하하" 웃음보를 터트렸다.

"정말 그 말이 맞네. 넓은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갓 잡아 올린 생선은 깨끗하고 비늘도 금방 벗겨지는데." 지나치며 그냥 듣고 웃어 넘기기에 하는 말마다 의미가 있다. "나에게도 농어의 피가 흐르고 있소"라는 말이 묘하게 와 닿았던 것은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이 껄떡처럼 보잘 것 없이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농어의 피가 흐르고 있소"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게 대한 자존감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그래 내게도 한때는 누구보다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어. 다시 힘을 내서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안 될 것도 없을 거야. 자기 자신에게 주는 자존감이란 것이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삶을 지탱해주고 비전을 갖고 살 수 있는 힘이 자존감에 있다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위치가 나의 꿈보다 훨씬 낮은 자리에 있더라도 "나에게도 농어의 피가 흐르고 있소"라는 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농어의 피가 껄떡처럼 살게 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껄떡처럼 살고 있더라도 커다란 농어가 되어 너른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빛나는 시절도 한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다가올 골든 타임을 위해서 그리고 다시 한번쯤은 골든타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행복하게 현재를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