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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청해진(淸海鎭)...〔9〕

(뜻풀이) 김의일 완도문화원 부원장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11.21 20:34
  • 수정 2015.12.0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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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創刊號)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의 행적(行跡)을 중심(中心)으로 한국(韓國)속의 완도(莞島)

노동야학사건(勞動夜學事件)으로 대신학원(대신학원)과 맹신학원(맹신학원)은 남녀야학생(남녀야학생) 사십여명(사십여명)이 피검(被檢) 문초(問招)를 당(當)한바 있으며 그밖에도 알지 못하여 누락(漏落)된 사건(事件)과 인명(人名)이 많을 줄로 생각되나 지금으로서는 방법(方法)이 없다.

여기 성명(姓名)을 밝힌 분들 중(中)에 송내호(宋乃浩), 신준희(申畯熙), 강정태(姜正泰), 정남국(鄭南局), 신광희(申光熙), 최형천씨(崔亨天氏)등(等)은 재옥(在獄) 십년(十年) 이상(以上)이며 송내호선생(宋乃浩先生)은 목포옥(木浦獄)에서 서거(逝去)하였고 왜구(倭寇)는 형기(刑期)가 남아있다는 이유(理由)로 유해(遺骸)를 내주지 아니하여서 돌아가셨어도 잔형(殘形)을 치루시는 등(等) 적(敵)의 미움을 받으신바 있다고 들었다.

그 밖에 투옥(投獄)은 면(免)하였으나 시종애국자(始終愛國者)로서 변(變)함없이 꾸준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하시던 분 중(中)에 나봉균선생(羅鳳抣先生)이 있고 그 외(外)에도 일제삼십육년간(日帝三十六年間)을 깨끗이 지내신 분들이 많았으며 적구(敵寇) 패망(敗亡)의 팔일오(八一五)를 왜군(倭軍) 헌병대(憲兵隊)에 구속중(拘束中)에 맞이하신 분들도 있다.

본군출신(本郡出身) 학도병(學徒兵)으로 일제(日帝)의 최후발악(最後發惡)에 강제징집(强制徵集) 되어 중국전선(中國戰線)에 출병(出兵)하였다가 용감(勇敢)하게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로 탈출(脫出)하여 일하던 청년(靑年)으로서 김장균(김장균), 박종선씨(박종선씨)등(等)이 있었다.

완도(莞島)는 당시(當時) 전국(全國) 십삼도(十三道) 이백십팔군중(二百十八郡中)에서 가장 적은 군(郡)으로서 엄청난 대가(代價)를 지불(支拂)하고도 조직적(組織的)으로 용감(勇敢)히 일제(日帝)와 싸우고 있다는 점(點)에서 전국(全國)의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군(郡:集團:집단)으로 불리게 되었고 따라서 기회(機會)있으면 완도(莞島)에 와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청(北靑)에 청년운동자청총상위(靑年運動者靑總常委)인 신철호(辛哲鎬), 서울의 차력왕(借力王)인 정근(鄭槿), 화가(畵家)인 김일(金一), 평양(平壤)에 노동운동자(勞動運動者)인 박승억(朴昇億), 함북(咸北)에 일본동경유학생(日本東京留學生)이고 시인(詩人)인 박아지(朴芽枝), 개성(開成)의 여성학생운동자(女性學生運動者)인 신경애(申敬愛), 상주(尙州)에 일본동격유학생(日本東京留學生)이고 현민의원(現民義院)인 전진한(錢鎭漢), 충남(忠南)에 김지섭선생의 조카(金祉燮先生侄氏)이고 일본동경유학생(日本東京留學生)이며 박열사건으로 오년투옥(朴烈事件五年投獄者)되었던 홍덕유(洪悳裕), 일본동경유학생(日本東京留學生)이었던 주진(朱震)부부(夫妻:부처), 전북(全北)의 청년운동자(靑年運動者)인 박용우(朴用雨)씨등(氏等) 분들께서 다녀갔었다.

송내호선생(宋乃浩先生)은 사립소안학교(私立所安學校)에 중국북만(中國北滿) 하루빈(哈루濱)에서 빈광국(貧光國), 간도(簡島)에서 강경환(康鏡環), 북청(北靑) 이시완(李時琓), 안주(安州) 강순달(康淳妲), 광주(光州) 김창선(金昌鮮), 해남(海南) 박영희부처(朴暎熙夫妻)등(等) 남녀(男女) 교원(敎員)을 초빙(招聘)하여 왔었다.

신지학교(新智學敎)에 강경환(康鏡環), 김창선씨(金昌鮮氏), 대신학교(大新學敎)에 서울 김한득(金漢得), 심재순(沈在順氏)여선생(女先生)씨(氏)등(等) , 금당학교(金塘學校)에 강진(康津) 오원석(吳元錫), 미라학원(美羅學院)에 목포(木浦) 이남순(李南順), 대전(大田) 홍덕유부인(洪悳裕夫人), 소진학원(小珍學園)에 목포(木浦) 이해숙(李海淑), 일신학원(日新學院)에 제주(濟州) 김윤봉씨(金允奉氏)등(等) 남녀(男女) 선생(先生)을 초빙(招聘)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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