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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존경하는 인물’에 전봉준이 없다니!

여의도통신 13호 커버스토리 ‘299리포트’에 의문을 달아본다 이이화(역사학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07.06.14 10:49
  • 수정 2015.11.1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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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비평> 편집인을 역임했으며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사업을 주도하였다. 저서로는 전 22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유명한 통사 <한국사 이야기>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이야기 한국 인물사> <한국의 파벌> <허균> 등이 있으며, 편서로 <동학농민전쟁 사료총서>(30권)가 있다.

여의도통신 13호에 게재된 ‘국회의원이 존경하는 인물’ 설문조사 기사를 보고 느낌이 있어 이 글을 쓴다. 그 설문조사를 본 한 독자가 역사학자인 필자에게 의견을 물어온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됐다. 사실 그 동안 존경하는 역사인물에 대한 조사가 있어 왔지만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서두에 말을 먼저 꺼내면 이러하다. 다득표 수대로 열거하면 김구(79), 이순신(31), 정약용(16), 세종(10), 아버지(8) 순이었다. 이러한 선정 결과는 일정하게 시대를 뛰어넘고 있으니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면 그 다음 순위는 링컨, 간디 그리고 만델라였다. 외국 인물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바람직하다.

 

그런데 말이다. 어딘지 이 의원들이 자기 개성이 강하지 못하고 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되풀이하거나 요즈음 언론에 뜬 인물을 염두에 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사실 우리 교과서에서 다룬 인물은 거의 봉건적 왕조적 기준을 따라 왔다. 민주시대에 걸맞지 않는 인물상이 판을 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치공학적 접근의 내면 읽어내야>

단순하게 따져보자. 지지난 대선 때 후보인 김대중은 전봉준을 내세웠다가 김구로 바꾸었으며, 정주영은 정약용을 내세웠다. 김대중은 평화통일을 염두에 두고 북한과 연계하면서, 정주영은 경제개혁을 새 정부의 기본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려 하였을 것이다. 나머지 후보들은 흔한 대로 이순신, 세종, 김구 등을 내세웠다.

 

이들 후보들은 역사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정치공학적 접근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역대 대선후보들이나 정치인들은 압도적으로 김구를 내세웠다. 표퓰리즘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내세워서 동감을 얻어 인기를 유지하려는 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다.

 

위의 역사 인물의 시대적 환경에 따른 한계를 지적해 보자. 이순신은 외침을 잘 막아냈으며 훌륭한 인격을 갖춘 애국자였다. 하지만 그는 영토를 넓힌 것도 아니요 내치를 이룩한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다. 세종은 제왕으로 민족문화를 일으켰고 문치로 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그는 왕조의 기반 위에서 정치를 펼쳤지 신천지를 개척하거나 평등의 사회를 이룩한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모순의 시대에 살면서 많은 개혁방안을 이룩한 탁월한 사상가였으나 이 개혁을 현실 속에 뿌리내리게 한 업적은 이룩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김구는 어떤가? 물론 그는 꿋꿋한 신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하려는 의지의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때로는 정치적 이해를 위해 통합을 거부하기도 하였고 그의 의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였다. 그의 암살은 역사적으로도 너무나 애석하지만 대중의 관심과 동정을 제고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위의 인물들의 이런 한계를 굳이 제시해 본 것은, 역사인물의 탐구영역을 좀더 넓게 좀더 다양하게 가져보자는 의견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지닌 다양성도 이와 결부될 것이다. 거듭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내세운 범위는 너무나 정치가 중심이었다.

 

그 대상이 소수이기는 하나 안창호, 안중근, 전태일, 장준하, 신채호, 문익환, 정조 등을 선정한 것은 다른 면을 보여준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들이 좀더 역사인물의 개성이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면 다양한 역사인물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보기를 몇 가지 들어본다.

 

개혁 논의가 한창 일어날 적에는 흔히 정조가 거론될 것이다. 정조는 조선 후기 여러 모순이 얽히고설킬 때 이의 개혁방안을 여러 모로 모색하였다. 세종보다도 훨씬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그가 추구한 농민적 수탈, 수령의 부정, 불평등의 신분차별 등에 따른 여러 개혁방안은 그가 죽고 난 뒤 일시 후퇴하였으나 현대에 들어 많이 실현되었다.

 

전봉준은 문벌정치가 자행한 부정부패와 농민에 대한 수탈, 불평등의 신분제도 등 봉건모순을 척결하려고 분연히 일어났고 일본의 외침이 있을 적에 최초로 민족모순을 풀려고 전면적 봉기를 단행하였다. 그의 거사가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저항정신은 근대에 빛을 던지고 있다. 그리하여 반독재 민주항쟁의 과정에서 그의 초상화는 언제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개혁과 저항의 퇴색을 반영한 것> 

정조가 통치자로서 사회개혁을 위해 수많은 방안을 내며 정열을 바쳤다면 전봉준은 이를 민중 속에서 실천적으로 풀어가려 하였다. 사회를 개조하는 개혁이 인기를 타고 독재에 대한 저항이 시대의 흐름을 탔을 적에는 정조와 전봉준이 역사인물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개혁에 식상하고 저항이 의미를 상실했다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정조는 3표를 얻어 링컨(7표), 간디(6표), 루즈벨트(4표)보다도 뒤졌으며 전봉준은 안창호, 안중근, 전태일, 장준하(각기 4표)와는 달리 한 표도 얻지 못했다. 개혁은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역사적 현실적 과제일 것인데도 이를 외면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평화통일과 남북대화 국면을 추구하면서 김구가 앞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을 빚은 것 같다. 또 이순신, 세종을 내세운 것은 교과서 또는 작품을 통해 전달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보수적 성향의 결과일 것이다. 다른 경우 정약용은 그의 여러 개혁 방안이 널리 알려진 데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편향된 시각에서 천민 출신으로 우리 과학사를 획기적으로 열게 한 장영실이나 우리  전통적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준 문익점이나 동의에 큰 공적을 쌓은 허준이나 해방공간에서 가장 인기를 누린 여운형은 낄 자리를 얻지 못하였다. 또 박지원 같은 창의적 문인이나 예술가들은 한 자리도 차지할 수 없었다.

 

이제 우리의 국회들은 좀 더 역사적 안목을 넓혀 민주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충실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현실정치에서 이를 반영하고 대중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소양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런 바탕에서 민주질서를 존중하고 인권문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미래사회를 열어갈 계기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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