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중동지역 성지순례와 문화체험기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07.05.04 09:43
  • 수정 2015.11.07 19:08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재규 (완도중앙교회장로. 완도문화원부원장)

 

성지순례란 무슨 뜻일까? 좀 생소하게 들리지만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순례자가 이곳저곳 성지를 찾아 방문하는 일’이라 설명되어 있다. 기독교적인 성지순례의 개념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한 땅, 즉 성지와 성인들의 유적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방문해 경배 드리는 신심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는 기독교 이외의 이슬람이나 불교 등의 종교에서도 행해지는 보편적인 관습과 유사하다.

 

지난 3월5일부터 17일(2주간)까지 완도지역 목회자 연합회의 “성지순례” 여행에 함께 동행하여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 이태리 4개국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이 나라들은 지리적으로 지중해에 인접하여 있으며, 수 천 년 된 고대 문화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적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종교적으로 이태리는 기독교(천주교), 이스라엘은 유대교,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슬람교가 국교인 차이도 있다. 이로 인하여 아직도 이 중동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간에 종교적 분쟁이 심하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은 자국 내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성지와 문화유적들을 자유롭게 순례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어 기행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방대한 방문 지역에 비하여 짧은 기간의 체험을 글로 옮긴다는 것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기’ 라는 생각도 들고 또 이미 성지순례를 다녀와 그곳 사정을 잘 알고 계신 분께는 이해를 구하면서 사랑하는 독자와 군민들과 함께 이 글을 나누고자 한다.  

 

성지순례’란 말을 접하면서 떠오르는 옛 이야기가 하나 있다.

 1200년 전 통일신라 때 일본의 규슈지방 승려 ‘엔닌’(圓仁)과 그가 쓴 ‘원인입당구법순례행기’ (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에 관해서다.

 

“엔닌”은 먼 대륙 당나라에 들어가 불법과 선진문화를 배워 고국 일본에 불교진흥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그 시대에 당나라로 가기란 천국에 가는 것처럼 어려웠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궁리하던 끝에 신라 땅 지금의 완도 청해진에 건너와서 그 당시 동북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보고 대사를 뵙고 자기의 품은 포부를 아뢰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엔닌의 간곡한 요청을 듣고 장보고 대사는 젊은 승려가 품은 뜻을 갸륵히 여겨 위험한 뱃길을 안내해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10여 년 동안을 당나라에서 순례 할 때 온갖 배려를 배풀어 주었다. 또, 일본에 돌아갈 때도 뱃길을 무사히 안내해 주기를 간곡히 탄원한 글을 올렸었다.(이때 장보고대사는 염장에게 피살됨)엔닌이 당나라에서 각처를 순례하며 매일매일 일기로 쓴 책이 유명한 '원인구법순례행기'(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이다.

 

그 일기책은 그 당시 장보고 대사의 활동과 대사께 입은 온정 등을 소상히 담고 있는데 오늘날 ’장보고 대사에 대한 연구와 왜곡된 역사의 재정립, 또한 그 시대 신라, 일본, 당나라와의 관계와 시대상황을 알 수 있어 사료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특이한 점은 엔닌이 장보고 대사를 찾아 뵐 때 규수지방 태수의 서한을 지참해 드렸는데 엔닌이 당나라에 갈 수 있도록 대사께서 도와주시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선구자로서 엔닌도 훌륭하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는 대륙문화를 배워오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는 우리들도 본받아야 될 점이라 생각된다

그럼 지금부터 필자의 여정에 따라 2주간의 성지 순례 기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이집트 아랍공화국의 문화체험

 3월 5일 오후 2시 인천 공항에서 프랑스 소속 여객기(KLM)로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 도착하였다. 잠시 후에 다시 이집트 카이로 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소요시간은 14시간이 걸렸다. 긴 시간이었지만 한국인과 외국인으로 편성된 기내의 승무원들이 어찌나 친절하고 서비스가 좋던지 특히 외국인 스튜디어스들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세심히 보살펴 주어 지루함도 그들 앞에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기대와 설렘이 교차하는 순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3월 6일 현지시간 2시 경 카이로 공항에 내려 가이드와 미팅 후 곧바로 첫 번째 숙소 카이로 피라미드 호텔로 향하였다.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는 거리에 신호등조차 없어 어딘지 어스름하고 질서가 없게 느껴졌다. 900만의 인구와 6000년의 역사, 고대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문명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는 도시라지만 활기 넘치는 우리나라 대도시들과 너무나 대조적 이였다. 차창 너머로 황량하고 광활한 사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집트>는 사하라 사막의 중심에 있어서 전국토의 95%가 사막이며 농경지는 5%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 종교는 회교국이며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고 인구는 6천6백5십만에 국토면적은 우리나라의 약 5배가량 된다니 생각보다 넓은 나라다.

 

 세계 3대 문화발상지이며 이집트 문명을 꽃피운 <나일강>은 이집트의 젖줄로 카이로 시를 관통하여 흐르면서 중동과 아시아를 잇고 있고,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성지인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과 7일 전쟁 때 빼앗겼으나 평화협정으로 되찾았다.

 

 이 시나이 반도 북쪽에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주는 <수에즈운하>가 있는데 지금은 운하 밑으로도 터널이 뚫려 교통망이 더욱 편리해졌다고 한다. GNP는 3000불 가량인데 높은 관광소득으로 살아가지만 문맹률이 높으며 가정은 일부다처제로 한 남편에 4명까지 허용되나 여기에는 엄격한 법 규제가 따른다고 한다.

 

 즉 각 여자를 동일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편애하거나 불화하면 엄한 형벌이 따르고 파혼의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기후는 일교차가 커 낮에는 따뜻하고 밤엔 쌀쌀한 편이라고 한다. 현대의 이집트는 이슬람의 중심지요, 동. 서양과 신. 구의 문화의 교차로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한국에 대하여는 아주 우호적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집트에서 일정은 3월 6일부터 8일까지(3일간)이었는데 주요방문 지역은 카이로 시내산,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국립박물관, 아기예수 피난교회순례, 나일강 펠루카 체험, 파라오의 온천, 성캐더린 수도원 방문 등이었다. 지면을 고려하여 중요한 기행지와 느낀 점만 소개하기로 한다.


 

▶신비로운 피라밋

3월6일 우리들이 아침 일찍 서둘러 피라미드 유적지에 갔을 때 우리 뒤로 각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다.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는 불가사의 하다는 말로 설명을 해야 할 정도로 살필수록 신비함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3개의 피라미드는 약4500년 전(BC26세기경)에 세워졌는데 파라오왕의 3대왕(할아버지<쿠푸왕>높이148m. 아버지<카프라왕>136m. 아들<멘카우라왕>66m)가 200m간격으로 세워졌으며 밑변이 230m 부피 2,594,914㎡이며 또 203개단으로 되어있고 석재 (1개당 무개 2.5톤) 268만개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호기심으로 내부를 관람하려고 좁은 입구에 들어서니 통로가 있었는데 9세기 때 알마문이 뚫은 도굴 구멍이라 한다. 밑으로 약 50m를 들어가니 지하에 축조된 왕 무덤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공기가 소통이 되지 않아 습기가 많고 약간의 냄새가 나기도 하였다. 이 거대한 건물은 누가 지었을까?

 

 성경학자들은 당시 잡혀온 포로들 중 머리가 우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제로 많은 희생을 치루며 동원되어 건축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헤로톡스라는 그리스학자의 학설에 의하면 피라미드 무덤은 왕을 신격화하던 시대에 왕의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으며, 연인원 10만명이 동원되어 2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스핑크스 

피라미드에서 300m 떨어진 동쪽 지점에 스핑크스가 있었다. 묘(피라미드)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태양신을 상징하여 우상으로도 섬겼다고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조각하여 높이20m 길이57m의 규모라니 감탄이 절로 났다.

 

 또 주위에 세워진 코브라 독사의 조각상은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졌고,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50평 규모로 축조된 계곡신전은 중간에 큰 기둥은 대리석이며 둘레석으로서 축조 되었는데 석재 1개의 무게는 30톤 가량의 화강암으로 되어있었다.

 

놀라운 것은  대리석은 로마에서, 석재는 멀리 시내산에서 나일강이 홍수로 범람할 때에 맞추어 옮겨왔다고 하니 그 충성심과 세밀함이란...  그 안에는 기묘한 형태의 장소와 희한한 제단이 있었고 바닥은 옥돌로 깔려져 있었다. 왕과 가족이 죽으면 그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는데 미라로 만들기까지는 뛰어난 전문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 지며 기간이 50일부터 70일이 소요되고 눈동자하나 상함 없이 소금과 방부제등으로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기가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 고고학 국립 박물관

3월6일 오후 카이로 시에 있는 이 국립박물관에 들어서려다 카메라부터 회수 당하였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면적에 선사시대 유물을 비롯한 희귀한 각종 소장사료가 10만 여 점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너무나 아쉬웠다. 특히 눈에 띤 것은 호화로운 왕의 금관과 석관, 미라, 왕들의 조각상, 미인상, 그림 등 생활풍습을 알 수 있는 각종 기구들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4000년~5000년경의 카프레왕. 멘카우레왕. 람세스왕등 파라오 왕들의 조각상 들 눈에 띠었다. 그 중 2개가 눈에 띄었다. 앉아 있는 왕의 조각상으로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얼굴은 잘 생겼으나 배가 크게 튀어나오고 양쪽 다리가 아주 짧은 왕의 조각은 그 당시(BC4~5천년) 이집트는 모계중심 사회였고 왕은 곳 신이었으므로 왕권을 계속 대물림하기 위해 자기의 직계의 모든 여자들(할머니부터 손녀까지도)을 모두 아내로 삼는 해괴한 풍습이 있었다.

 

유전학 상으로 근친결합으로 태어난 자녀는 기형아가 많은데 바로 이 왕이 기형아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왕은 양다리(장단지)가 엄청 통통한데 이는 질 좋은 식품은 많이 섭취하지만 밖이 위험하여 외부활동을 하지 못하므로 신부전증이 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왕의 모습을 조각했으니... 또 옆으로 10m 지점에는 미인상과 4700년경에 그려졌다는 채색그림 작품이 신기했다. 아주 잘생긴 미인상은 45도 각도를 유지하여 약간의 미소 띤 모습으로 먼 발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현대에서도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45도의 각도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원시시대에 그려진 채색 그림은 한 남자가 사물을 깊이 관찰하는 모습으로 그의 눈동자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실핏줄이 서 있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너무 신기했다.


 

 

 

▶예수 피난교회(꽃빛교회) 

카이로 시내에 ‘예수피난교회’가 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해롯 왕은 새 왕이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태어난다는 소식을 동방박사들에게서 전해 듣고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그 시간대에 태어난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비극을 저질렀다.

 

 이 때 예수의 부모는 아기 예수를 안고 이집트로 피난을 와서 몇 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예수를 기념하기 위해 3세기경에 세운 이집트에서 최고로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라고 한다. 교회 벽면을 빙 둘러 20여 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로 제자들의 성화와 예수님 십자가상과 만찬상 그리고 마리아상 등 이였다. 놀라운 사실은 이 그림들은 1000년이 넘도록 색상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림의 재료 때문이라고 한다.

 

중동지방에는 여러 종류의 색상이 들어있는 석회석이 많은데 지금도 이 석회석을 갈아 그림 재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 교회는 비록 이슬람권 내의 교회이지만 이스라엘의 자치령으로 되어 이스라엘 군인들이 보호하고 있었다.          


 

▶낙타를 타고 시내산 등정

3월7일 오늘 일정은  시내산(해발 2286m)등정이 들어있다. 시내산은 백두산 보다 조금 낮지만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찾는 산이다. 시내산은 모세가 이집트에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중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다는 성산이다.

 

 우리 일행은 3월7일 밤에 모간란드 뉴인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기 바쁘게 시내산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3월8일 새벽 0시에 다시 일어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험준한 바위산을 낙타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산의 중간지점(해발1000m)까지 올라가는데 2시간이 걸렸다. 낙타를 타고 험한 바위산을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낙타의 높이가 말보다 높아서 위험하게 보였으나 훨씬 쉽고 편안했다. 주인들이 낙타를 줄지어 몰고 올라갔는데 일렬로 따라오는 모습이 구절양장 장관이었다.

 

낙타는 이곳 사막의 주민들에게 유일한 교통수단이요 값진 재산이란다. 이 지역 주변에 낙타를 소유한 가정이 많아서 약500마리 가량이며 주로 관광객을 상대로 얻는 수입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낙타는 수명이 약 30년이며 성품이 아주 온순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른다고 한다.

 

발바닥이 잘 발달하여 제 아무리 돌과 모래나 자갈밭 가파른 비탈길도 한발 실수 없이 꼭 제가 가는 길로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정확히 걷는 보배로운 짐승이라 자랑하였다.  산 중간 1000m지점에 내려 물을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여기서부터 걸어서 1시간 동안을 다시 올라가는데 너무 힘들어 서로 끌어주며 도와서 4시경에야 겨우 정상에 도착하였다.

 

움막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니 새벽이 다 되었다. 일출장면을 보려고 할 즈음 어느 새 수백 명의 관광객들이 뒤따라 올라와 함께 했다. 조금 지나자 동이 터 오르고 빨간 얼굴로 살짝 솟아오르는 해를 보는 순간 찬송과 탄성소리로 온 산이 메아리쳤다.

 

엷은 햇살이 바위산에 천천히 비쳐질 때 산들이 홍조로 변하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선경이라 해야 할까! 정상에 있는 모세기념교회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니 시내산 길목에 7~10세 가량된 사내아이들이 “1달러 1달러” 소리치며 물건을 팔고 있는데 고사리 손에는 고운 구슬이 들려있었다.

 

애처롭기 짝이 없는 저들은 가정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씁쓸했다. 이집트의 문맹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있었다. 이곳 가까이에 유명한 “성캐더린 수도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캐더린 수도원 

4세기 때 믿음을 지켜 순교한 소녀 캐더린의 이름을 따서   수도사들이 건립한 수도원이며 해마다 세계의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11세기 이슬람시대나 나폴레옹도 이 수도원을 보호하고 보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은 이 수도원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내부에는 2000점이 넘는 역사적인 성물과 성화가 장식되어 경건함을 더해 주었으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불꽃에도 타지 않았다는  떨기나무도 있었다. 또 캐더린도서관에는 희랍어와 각국 나라언어로 쓰여진 희귀본 성경 사본들이 3500백여 점 소장되어 있어서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도서관이라고 한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