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문화예술의전당은 2008년 6월 착공해 2010년 10월 준공했다. 완도군과 완도문화사랑(주)이 민간투자방식(BTL)으로 추진한 사업으로 총 154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문화예술의 전당은 500석 규모의 공연동과 문화동, 야외공연장 등 3개의 공간으로 조성됐다. 공연동은 오페라. 뮤지컬. 관현악 연주. 연극 등 다양하고 격조 높은 예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최첨단 무대장치와 음향, 조명장치 등을 갖추고 있다.공연동 맞은편에 3층 규모로 지어진 문화동은 각종 문화 창작과 취미활동, 실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
뱀뿐이랴, 섬이나 해안 지방에서는 헝겊이나 벙거지, 떠밀려온 통나무나 바위 조각 하나도 신이 될 수 있었다. 어디보다 생사가 화급한 곳이 바다다. 목숨을 살리는데 도움을 주고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은 무엇이고 신 아닌 것이 있으랴. 세계 종교가 된 유일신교들은 보이지 않는 신도 철썩같이 믿는데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어찌 잘못이며 미신이겠는가. 하지만 섬에서는 이제 무속이나 당제가 사라지고 없다. 전래의 신들은 모두 쫓겨나고 섬은 외래신이 접수했다.장고도 초등학교 운동장. 오늘은 학교가 텅 비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모두 대백제(大
“때때로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에는 정교한 자성(磁性)이 있어서 우리가 부지중에 이를 따르기만 하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해 준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소로우 ‘산보’)제주 섬을 걷던 내가 불현듯 서해의 섬들로 갈 생각을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나 또한 ‘자연의 정교한 자성’에 이끌린 것일까. 어찌 아니겠는가. 만물에는 서로를 이끄는 힘이 있지 않은가. 나는 다만 더 큰 인력이 작용하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나는 지구라는 둥근 행성 안에서, 혹은 우주라는 원안에서
오늘 전쟁의 흔적은 간데없고 한산도 바다는 더없이 맑고 푸르다. 인류의 사전에서 전쟁이란 단어가 사라져버릴 날이 올 수나 있을까. 이순신 장군도 그런 날을 꿈꾸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순신 장군을 전쟁영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그네는 장군이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군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건 평화를 지키기 위한 고투였다. 흔히 전쟁영웅들은 국가나 왕조를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행위를 정당화 했다. 전쟁의 승리가 무엇보다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은 그들과
임진왜란 당시 함포는 조선이 절대적인 우세였다. 하지만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다시 포를 쏘는 데까지 중간 간격이 너무 길었다. 전함 숫자가 적은 조선으로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와키자카는 조선수군이 일자진을 펼칠 거라 예상했고 그래서 전함 숫자가 월등한 자신들이 일자진을 깨버리고 포위해 들어가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이순신은 일자진이 아닌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본래 육전에서 발전한 진법이었는데 이순신은 이를 해전에 응용했다.학익진과 함께 조선 수군이 한산해전에서 승리할
'이른 아침 조계종(趙繼宗)이 현풍 수군 손풍련에게 소송을 당한 결과 마주 대면하고 공술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갔다.'(1596.2.20)'날이 어두워질 무렵 영등 조계종이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마시기를 권했다.' (1596.2.20)'밤 9시가 지나서 영등 조계종이 그의 딸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왔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았다. 11시가 넘어서 돌아갔다.'(1596.3.23)전란 중에도 조정은 여전히 부패한 자들의 잔치판이었다. 이순신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처형하고 또 처형해도 처형당할 자들은 넘쳤다. 전쟁터에 사람이 설자리는 없다. 대체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란 무엇인가. 이순신 또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적과 탈영병을 가차 없이 처형하고서는 어머니와 자식들 걱정에 날을 새고 또 병사들의 고통에 눈물 흘렸다. 전장은 죽음과 삶의 경계였다.'미역 60동을 따왔다. 군관 정사립이 왜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1594.3.23)'송한령이 대구 10마리를 잡아 왔다.'(1594.11.5)'견내량의 군사 방어선을 넘
이순신은 도망치다 잡혀온 수군들을 처형한다. 군율을 엄하게 하는 것은 병사들을 전장에 붙들어두기 위한 고육책이다. 병사들을 전장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애국심이 아니다. 공포다. 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난중일기에 적의 수급을 베어낸 기록만큼이나 탈영병의 목을 베었다는 언급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의 안과 밖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무능하고 물정 모르는 임금은 그저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가서 물길을 끊고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 '부산으로 가서 돌아가는 적들을 무찌르라.'
노동력이 없으니 그 좋은 논들도 다 묵혀두고 있다. 겨울에는 북풍이 많이 불고 수온이 차서 어류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바다가 겹 섬이 됐으면 좋을 걸, 홑섬이 되니까 바람이 들이처분께 암 것도 못해요. 바다 양식도 못하고 하우스도 못하고. 전부 맨 늙은이들뿐이라 추우면 회관서 점심해 묵고 노는 게 일이요. 딴 데는 돈 버느라 정신없는데. 편한 섬이요."이장님은 편안하게 사는 섬이라고 넋두리처럼 말씀하지만 나그네가 보기에 섬에 이리거리가 적은 것이 오히려 노인들에게는 복이지 싶다. 추운 겨울에 고생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밥 굶지
득량도행 여객선은 녹동 쌍충사 아래 부두에서 출항한다. 고흥군 도양읍 득량도는 득량만 안의 섬이다. 보성군과 고흥군 사이의 바다가 득량만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득량도 때문이라 한다. 하루 두 번 오고 가지만 여객은 드물다. 작은 선실에 오늘 여객은 셋. 장흥 사는 할머니 한분은 득량도에 시제를 모시러 가는 중이다. 가까운 거리지만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려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왔어. 서울서 오는 거 보다 더 멀어"득량도에 살던 할머니의 가족들은 모두 보성으로 이주해 살지만 같은 씨족 사람들은 대부분 섬에
노대도 사람들도 욕지도처럼 어류양식을 많이 한다. 주로 조피볼락(우럭)이나 돔, 농어, 감성돔 등을 기른다. 상리 마을도 주민 60%가 양식으로 살아간다. 상노대 상리와 하노대 사이 바다는 섬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하다. 양식을 하기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여기도 수상가옥에 살면서 양식장을 돌보는 이들은 대부분이 동남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다. 초창기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다.해상 가두리 양식을 하는데 기르기 어려운 어종 중 하나는 도미다. 도미는 그물을 물어뜯
내 눈을 의심했다. 드라마나 영화라도 촬영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돛단배라니! 과거로 시간여행이라도 온 것일까. 내가 방금 타고 온 바다랑 호가 사실은 타임머신이었던 것일까. 아직도 돛단배, 범선으로 어로를 하는 어부가 있다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 그도 아니면 전시관이나 박물관 혹은 관광용으로 띄우는 범선은 더러 있지만 실제 물고기를 잡는 범선은 이 나라 어느 곳에도 더 이상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돛을 달고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을 만나다니!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학림도는 도미와 우럭 같은 어류 양식장이 많지만 옛날에는 섬 주변이 온통 황금어장이었다. 지금은 물고기의 씨가 말랐다. 깔치(갈치), 조기, 삼치, 멸치가 지천이었다. 학림도 앞바다는 평균 14미터 정도로 수심이 깊고 조류 유통이 잘 된다. 그러니 해마다 통영 바다를 덮치는 적조에도 피해가 적은 편이다. 그 바다 덕에 옛날에는 물고기가 득시글거렸었다. 지금은 큰 배들이 멀리 동중국해까지 내려가 싹쓸이 해버리니 이 바다까지 살아서 오는 놈들이 없다.옛날 학림도 사람들은 통영 전통 어선인 통구미배로 조업을 했었다. 먼 바다까지 나가지
나무나 돌이 변해서 생기는 도깨비 도깨비, 세상에 이보다 더 어리숙한 신(神)이 또 어디에 있을까. 어린 시절 고향 섬마을 산속 외딴집에 살던 친구의 아버지는 밤마다 고갯길에서 도깨비를 만났다. 친구 아버지는 그때마다 술에 취해 있었고 도깨비는 언제나 씨름을 하자고 졸랐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친구 아버지의 완승. 다리가 하나뿐인 그 도깨비는 씨름으로는 결코 다리 둘인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도 지치지도 않고 씨름을 하자고 덤비는 미련함이라니! 친구 아버지가 다음날 낮에 멀쩡한 정신으로 도깨비와 씨름하던 장소에 가보면
추도는 물이 좋기로 유명한 섬이다. 산에 나무도 울창하다. 가래나무가 많았다 해서 가래 추(楸)자를 써 추도다. 추도 희망봉 꼭대기에는 드넓은 고원이 있다. 옛날에는 고구마밭이나 보리밭으로 활용했었지만 지금은 묵정밭이 되었다. 희망봉 고원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9부 능선에서 물이 솟구친다. 용천수다. 산에서 솟아나 흐르는 염기가 전혀 없는 추도의 물은 달디 달다. 그래서 추도 물로 위장병을 고쳤다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윗새미, 동서 아래새미 3곳의 우물에서 물이 펑펑 솟아났다.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급수선이 들어 온 적이 없다.
겨울 추도는 온통 물메기 세상이다."어찌 추도 왔으꼬?""물메기가 많이 난다해서 구경 왔습니다.""아, 그래 왔습니까."통영시 추도(楸島) 미조마을 부둣가, 노인 한분이 통발 그물을 손질하고 계신다. 노인은 물메기 잡는 통발 그물이 찢어진 것을 이어 붙이는 중이다. 추도는 통영에서도 이름난 물메기의 고장이다. 통영 지방에서는 물메기국을 겨울 해장국의 으뜸으로 친다. 마른 메기는 잔치음식의 대표다. 전라도 잔치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치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
노인들은 저마다 영화롭던 섬의 옛 시절을 회상하며 모처럼 들뜬다. 곤리도는 고니섬, 고내섬, 곤이도(昆伊島), 곤하도(昆何島) 등 당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곤리도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섬의 모양이 하늘을 날아가는 고니(白鳥)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섬에 겨울 철새인 고니가 많이 찾아들곤 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진위야 어떻든 섬이 고니와 연관이 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웃 섬 학림도 또한 학이 많이 날아들어서 학림도라 했다는 것을 보면 이 근방 섬들이 한때는 철새들의 서식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까닭에 두섬을
꽃게는 가을동안 잡고 겨울에 잠깐 쉰 뒤 봄부터 6월까지 또 잡았다.7~8월은 산란철이라 금어기. 꽃게잡이 때는 한사리 동안 배에서 생활 하다 잠깐씩 집에 다녀오고는 내내 바다에서 살았다. 꽃게잡이 때 바람이 불거나 그런 날은 굴업도로 들어갔다. 바람이 그치지 않으면 며칠씩 굴업도에서 놀고 그랬다. 민어파시의 고장 굴업도의 영화가 꽃게의 시대에도 이어졌었다. 그물에 걸린 게를 딸 사람들도 데리고 가서 굴업도에 방 얻어주고 지내게 했다.덕적도 근해에서 꽃게를 잡으면 덕적도 독강으로 운반선이 실으러 왔다. 좋은 물건은 전부 일본으로 갔
인천 거북시장에서 112번 버스를 탄다. 신현 치안센터 정류장에서 밤색 외투를 입은 여자 하나 차에 오른다. 버스는 빈 좌석이 많다. 여자는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주저 없이 빈자리에 가 앉는다. 거침없는 여자의 태도가 부럽다. 나는 버스에 오른 그 짧은 순간에도 어느 자리에 앉을까 계산하며 머뭇거리고 주저 한다. 빈자리가 하나뿐이라면 나 또한 선택의 여지없이 앉을 것이다. 하지만 자리가 두 개만 남아도 저울질하느라 내 머리는 복잡해진다. 대체 짧은 거리를 가는 시내버스 좌석 하나 잘 잡았다고 얼마나 큰 이득을 얻겠는가. 그 사소한 선
풀등에 발을 내리자 곱고 부드러운 모래땅이 나그네의 지친 몸을 받아 준다. 풀등은 신기루가 아니라 바다의 오아시스다. 예전에는 썰물 때면 풀등의 웅덩이에 갇힌 꽃게, 새우, 광어 등을 거저 주어 담을 수 있었다 한다. 서해 바다에 물고기들이 넘치던 때 이야기다. 오늘 풀등은 바다의 사막처럼 황량하다. 겨울 동안 풀등을 떠나 있던 거주자들 대부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수온이 높아지는 5,6 월이면 그들이 다시 몰려 올 것이다. 그 때는 깊은 바다 속에서 추위를 피하던 골뱅이도 풀등으로 올라와 몸을 숨기고 방게들도 무리지어 다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