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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사업의 아버지 문병일 前완도군수

운(運), 근(勤), 둔(鈍)의 자세를 공무원의 신조로 여기며 살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07.02.24 15:54
  • 수정 2015.11.0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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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아들 문신천씨(사진왼쪽)와 문병일씨 부부의 단란한 모습  ◎완도신문

 

 

완도를 벗어나 도시로만 가려는 학생들을 안타깝게 여겨 완도 명문고 추진과 장학사업을 기획했던 전직 완도군수가 지금의 군민들에게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어 본지가 직접 찾아 나섰다.

 

이제는 평범한 한 시민으로 돌아가 광주 중흥동에서 살고 있는 문병일 前완도군수(74세)는 지금도 완도군민들에게 장학사업의 시초이자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고향담배 사피우기를 통해 20억을 조성하고 장학금 지급 등 장학사업의 초석을 만들었지만 모든 노력을 일선의 공무원에게 돌린 문 전 완도군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모든 시간과 정열을 완도발전을 위해 많이 힘을 쏟았다고 말한다.

 

그 당시 “담배 팔아서 20억원을 모금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죠, 뜻이 좋아 그렇지 공무원 모두들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따라줬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후임 차관훈 민선군수가 장학사업의 규모를 더욱 늘려줘서 고맙고 존경심마저 든다는 문 전임군수는 행정가들은 대부분 개인 업적을 잘 이어받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데 차 군수가 장학사업을 이어받아 기금조성을 더욱 키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독거노인을 위해 집을 고치고 보살피며 생일상 차려준 일이 어제의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는 문 전군수는 처지가 변변치 못해 숨어산다는 농담을 하면서도 완도가 정이 많이 들었고 알고 지낸 친구들도 그리울 때가 많이 있다고 했다.

 

93년1월~94년12월까지 완도군수로 있다가 95년 1월 장흥군수로 가면서 완도를 떠나게 된 문 군수는 완도공무원 중 특히 최명수씨와 곽태웅씨가 제일 생각난다며 아끼던 두 사람에게 늘 일만 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고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는 속마음을 열었다.

 

문 군수는 현재 매일 전남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며 건강을 지킨다. 남은 시간은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 前보성군수인 윤관중씨와 자주 대화를 한다는 문 전 군수는 평생의 작업으로 40년간 수집한 신문자료와 자신의 흔적을 통해 회고록을 준비 중이고 77세(喜壽)나 88세(米壽)에 출판하는 것이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언론관계에 있어서 문 군수는 도 공보실장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통해 군을 위해서 좋은 기사를 많이 쓰는 기자는 반드시 사례를 했다. 하지만 잘 봐달라는 청탁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했다. 군의 잘못된 정책을 기자들이 꼬집으면 겸허하게 수용하고 연루된 직원들은 크게 나무라고 꼭 개선할 수 있도록 힘썼다고 한다.

 

 

문 전 군수는 진정한 민선군수라면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복지정책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참다운 지방자치에 맞는 군수일 것이라며 평소 가지고 있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특히, 자신의 업적을 미화시키거나 포장광고는 절제해야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문 전 군수는 공직에 첫 발을 내딛는 신입공무원들에게 공무원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운(運), 근(勤), 둔(鈍) 을 권했다.

 

성실하게 일해도 어느 정도 운세가 따라줘야 승진이 된다는 운(運), 정직하고 성실한 기본자세로 생활하라는 근(勤), 속은 영리하고 능력이 있지만 겉으로는 조금 모자란 듯 겸손함을 보이라는 둔(鈍) 을 공무원 신조로 삼으면 군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공무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부인 김동례(69세)여사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고 있는 문병일 前완도군수는 고향은 광주지만 완도가 부모처럼 그리울 때가 많이 있다며 도움을 많이 받은 제2의 고향 완도가 잘살고 앞으로 더욱 많은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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