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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도 언덕길에 검은 지팡이와 하얀 할머니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11.1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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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동리와 모서리 두 개의 마을을 거느리고 있는 대모도의 모서리는 어업이 주를 이루고 초등학교와 파출소는 모서리에 있는 반면 농업이 주를 이루는 마을인 모동리에는 면출장소, 보건진료소, 우편취급소, 한전 등 행정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대모도는 일주도로가 없어 모서리와 모동리를 이어주는 길만 존재한다. 그래서 두 마을을 두고 왕래하려면, 배를 타는 게 더 편하다는 게 주민들의 말.


동쪽에 있는 모동리는 청산도가 빤히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모동리 평란골의 지명을 볼 때 이곳은 삼별초 난과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주민들의 피난처로 붙여진 지명이며, 망재 주변에서는 갯돌과 토기조각들이 출토 된 점으로 보아, 인조조 이전에 주민이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또 석기시대 석토가 발견되는가하면, 고려시대의 풍습 중 하나인 고려장이었던 풍습 지명도 발견되는데, 업어서 그곳에서 운명하게 했다는 업사냥골이란 지명도 내려오고 있다.


이 섬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톳 양식을 하면서 전복을 채취하여 공동으로 분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3년에는 1억 9천만 원의 소득을 올려 분배하였다고 한다. 1994년 말 한전이 75%, 군 도비 25%로 자가 발전시설이 들어섰으나 2004년부터 해저케이블을 이용하여 24시간 전기를 쓰고 있다.


교통수단으로는 명령항로에 취항하는 새마을호가 다였지만 승선정원에 45명이어서 낚시객이 많을 때는 지역민은 후순위여서 가고 싶은 시간에 갈 수가 없는 때도 있었다. 이 섬에는 그만큼 낚시객이 많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섬사랑 7호가 06시10분, 15시, 두 차례 배가 다니고 있다. 


섬은 모두가 그러하듯 모서리는 당제를 지내고 있으나 모동리는 지내지 않는다.
모서리의 당제는 정월 초하루 저녁 무렵 당집에 올라가 초이튿날 9시쯤 산신과 지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비는 의식을 하고 바닷가로 내려와 갯제를 지낸다.
갯제는 볏짚으로 만든 배를 만들어 그 위에 음식을 차려 놓고 굿을 하며 바다풍년이 들기를 빌고 바다로 떠나보낸다.


이때 제주로 선택된 사람은 한 달 전부터 금기를 하고 제사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의 말을 해서도 아니 된다. 꼭 말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손짓으로 의사표시를 한다. 제사가 끝났더라도 한 달 간은 궂은일을 삼가지만 만약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기면 제사를 잘못지내서 라고 생각하고 다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온 정성을 다하였다.


소모도 언덕길을 올라가는 검은 지팡이와 하얀 할머니
지팡이는 할머니를 만난 지 3년 됐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80년을 지내다가
지팡이를 만난 후부터는
지팡이 없이 하루도 지내지 못한다


할머니는 나를 보느라 지팡이를 세워놨는데
지팡이는 나를 보지 않는다
할머니는 나를 보겠다고 허리를 펴는데
지팡이만큼 펴지지 않는다


지팡이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할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지팡이는 할머니 없이 걷지 못하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고
이렇게 못하는 것끼리 만나
못하는 일 없이 사는구나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이생진 시인이 소모도에서 와서 노래한 지팡이와 할머니로 젊은이가 없는 섬마을의 풍취를 그려낸 것인데, 대모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소모도는 행정구역상 모북리로 이곳은 1620년경 황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였다 전하고 있으며, 그 후 최씨, 서씨 등 제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모도의 북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모북리’, 혹은 ‘소모도’라 칭하였으며, 동으로 대령산, 남으로 불선봉, 서쪽에는 등대가 있는 섬이다.


섬이 작아 작은 섬이라 하였으며, 옛날부터 띠가 많아 띠 섬 또는 소모도라 칭하였다고 한다. 면적은 0.078 ㎢에 불과한 조그마한 섬인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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