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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땅끝까지 떨어질 때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11.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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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슴에 묻었다. 웃고 지내다가, 음식을 먹다가도 감정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온다.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쿵 하고 모든 장기가 내려앉는 것 같다.
누군가는 슬픔에 기간을 정해 놓았지만, 지구가 멸망해도 끝날 수 없는 슬픔이다. 일 년 후, 십 년 후, 내가 살아 있는 한 미안하고 슬퍼할 것이다. 


애도는 그런 것이니까.
하루하루를 산다는 건 어쩌면 슬픔을 통과하는 여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많은 사람이 슬픔에 갇혀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사람으로 사는 이상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계절이 하는 일이 낙엽을 떨구는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실의 아픔을 혼자서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그다음은 누군가 대답해야 할 목소리와 시간이 해야 할 몫이 남겠지.


요 며칠 편안하게 잠드는 게 힘들다. 밤새워 뒤척이다 새벽이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다섯 시쯤 창문을 열었다. 밖을 내다보니 가로등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마치 노란 조등처럼 허공에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했다. 뿌연 습도가 앞 동의 윤곽을 삼켜버린 시간, 밤사이 켜졌던 가로등이 꺼지고 검푸른 빛이 돌며 어스름한 시간이 올 때까지 나의 시선은 바깥을 향해 있었다. 


오전의 햇살이 무거운 암회색 공기층을 통과해보려고 애쓰는 동안 바람은 나무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노랗고 빨간 낙엽이 바닥에 층층이 쌓였다. 층층이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이 겹겹이 많아질수록 허무했고, 헛헛했고, 공허했고…. 비슷한 감정의 단어들이 함께 쌓였다.
 며칠 전 수원에 있는 광교산에 간 적이 있다. 산행이 목적이라기보다는 그냥 조금 더 먼 곳으로의 산책이었다. 


둘레길을 돌다가 산 아래로 내려왔다.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도시이면서 '도시가 아닌' 공간을 한참 가로질러 걸었다. 비닐하우스로 지어진 화원, 백숙 요리를 파는 보양식당과 보리밥을 파는 밥집을 비껴왔다. 도시와 도시가 아닌 것을 교묘히 시침질해 그럴싸하게 하나의 옷처럼 만들어 놓은 곳. 그 옷자락 한 귀퉁이, 그러니까 광교산 아래 호수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노인이 호수를 향해 앉아 있었다. 


앞으로 둥글게 말린 그의 등이 가을볕을 받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나뭇가지에 바람이 일자 굽은 등 위로 불그스름한 나뭇잎이 떨어졌다. 하염없이 호수의 주름진 물결만 바라보는 등 뒤에서 노인의 시선을 따라 수면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봤다. 낙엽 지는 나무 밑에는 늙어 가는 노인이 있었다. 그 옆으로 빨갛고 노란 나뭇잎이 층층이 쌓여갔다.


안개가 자욱한 산책로를 걷다가 어째서 그날 노인의 뒷모습이 환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를 찾는다면 감정의 부산물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생애를 다 살아버린 노인이, 거짓말처럼 일어난 일로 생을 마감 당한 사람이 바로 나인 것처럼. 거울 속의 나와 마주한 듯, 나른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이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 
'인생'이라 부르는 것이 '되돌려 감기'한 필름처럼 내 앞에서 같은 구간이 재생되는 것 같다. 나는 같은 자리에 서 있는데 풍경이, 계절이, 그리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자전하는 듯한. 잎이 물들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떨어지는 사소한 일마저, 시간이 내가 아닌 것들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모든 편견을 거부했던 그 골목을 다시 걷는다면, 그곳에 낙인 같은 편견이 쌓여 있는 건 아닐까. 매 순간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변모할 테지만. 
우리는 두 번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그 길로 돌아갈 수 없을 테지. 


그런데도 그곳에서 우리가 꿈꿀 소리와 색깔을 찾으면서. 골목으로 찾아들 빛과 그림자를 우리의 삶에 덧씌우면서. 일상 위에 처연한 빛을 드리우면서. 매일은 아닐지라도, 자주는 아닐지라도 그곳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모두 알고 싶어 하는 이유가 좁은 골목에 갇히는 일이 없기를.

 

 

김지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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