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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오월, 다원과 다승을 찾아서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15 09:43
  • 수정 2021.05.1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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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뒤로하고 완도수목원을 빠져나와 죽청리로 향했다. 미심쩍은 것이 있어서 친절한 완도군 직원에게 정보를 전달받고 다시 군외면 불목리에 있는 청해진 다원을 찾았다. 장보고 유적지를 지나 구불구불한 옛 도로를 유유자적 드라이브하면서. 거의 30년 만에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버스를 타고 완도를 찾을 때마다 외부인의 눈에 비친 바다풍경은 늘 신선했다.


명절 때 고향을 찾거나 외지를 다녀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완도사람들은 얼마나 가슴 설레었을까? 생각하니 바다는 지역의 풍성한 자원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바다가 보이는 유휴지에 다원(茶園)이라도 끝없이 펼쳐진다면 더없이 좋을 것만 같았다. 범해 각안과 응송스님의 출생지 인근에도 차밭을 만들어 그들을 기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네비는 저수지를 끼고 들길로, 산길로, 돌고 돌아 목적지 까지 나를 안내했다.

 

 

다원은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곳에 있었다. 늙은 염소가 차분히 쉼터에 앉아 침입자를 노려보며 되새김질 하고, 뒤이어 새끼염소 무리가 풀밭을 뛰어다닌다. 총총걸음으로 모이를 쪼는 닭 무리 위로 계단식 논을 일군 차밭이 보였다. 이곳이 완도유일의 차밭 청해진 다원이다.

마을의 우물이며 옛 집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여 원불교 완도교당에서 가꾸는 중이라고 했다. 관계자들은 바쁜 일에 몰두하느라 외부인의 방문이 버거운 모양새다. 차밭을 차분히 둘러보고, 맘껏 구경하고, 조심히 가라는 멘트를 날리며 다시 공사삼매경이다. 지역의 차문화에 대해 숨은 이야기를 더 찾아낼 수 있을까하여 기대하던 참인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목가적 봄 풍경이 살랑거리는 들녘을 만끽하며 숙승봉을 돌아본다. 하늘을 우러러 우뚝 솟은 바위가 명품이다. “야, 고것 참 멋진 녀석이네!” 감탄사 연발이다.

 

초의선사의 다맥을 이은
완도출신 범해 각안, 응송 스님의 흔적을 찾아서

 

며칠간 나는 범해 각안과 응송 박영희 스님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사정리(구계등)와 죽청리 출신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이끌려 완도향교 일대를 샅샅이 탐문조사 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완도신흥사에 응송스님의 자취가 남아있음을 알았다. 지난 10일 찾아간 신흥사 앞마당에는 석탄일에 맞춰 형형색색의 연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열과 행을 이룬 연화는 오월의 바람결에 흔들흔들 완도의 섬과 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화사한 빛을 발산했다. 

 


 완도 신흥사 약사전의 ‘목조약사여래좌상’(문화재 자료 제 213호)은 임란의 혼란기를 지나 불사를 이루는 시기에 조성했다. 조선전기 전통을 계승하는 의미를 지닌 중요한 사료이고, 발원문에는 “1628년 조성되어 대흥사 심적암에 처음 봉안되었다가 완도출신 응송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응송 스님의 자취를 여기에서 찾는구나!”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마당을 기웃거리며 촬영을 이어가는데, 멀찍이서 스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누가먼저랄 것도 없이 정면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응송스님을 기념한 작은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대흥사로 가져갔는지 지금은 없네요.” 이곳은 대흥사 말사가 아니고 백양사 소속이라는 것.
아차, 여기에도 라인이 있구나 싶었다. 그것은 시대마다, 사람이 사는 곳마다 정해진 당연한 규율인 것 같다. 완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남망산에 위치한 이곳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절경이었다. 임진왜란 때 가리포진 순시를 왔던 이순신은 이곳에 올라 ‘적이 지나가는 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요충지라’라며 난중일기(1596년 8월 24일)에 기록했다고 전한다.

 

응송스님의 업적 알리는 제자,
그는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이다

 

응송스님에게서 초의선사의 차맥을 이어온 제자가 있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동국대 교수인 박동춘 소장이다. 그는 29세 젊은 나이에 백화사에 있는 응송스님을 찾아가 초의선사의 다법을 전수 받았다.


대처승인 이유로 불교계에서 배척된 응송스님은 대흥사 사찰 아래서 초의선사의 다법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가 연로한 몸을 걱정하여 한학에 능통한 젊은 인재를 찾고 있었다.
초의선사 유품과 다법을 전수해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동다송’과 ‘다신전’을 비롯한 초의선사의 유품을 일본에 빼앗길까봐 생명처럼 간직하면서 초의차의 맥을 이어왔는데, 지금 한국의 차계에서는 그를 외면하고 있다.


제다법의 무형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차계가 산통을 겪고 있어서다. 한국 전통제다법의 전승 유무, 다풍 전승 흐름의 사실관계에 대한 갑론을박이 심화됐다. 지난 2016년 응송스님 열반 25주년 기념식에서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박사는 초의선사의 다법을 완도출신 범해 각안에 이어, 응송스님이 오롯이 전수받았다고 강한 주장을 펼치는데...  <계속>


정지승/다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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