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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15년만에 텅빈 곳간 가득 채워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15 09:37
  • 수정 2021.05.1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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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를 암살한 바탕에는 청해진제국이 이룩한 해상무역을 통한 경제적 부를 신라왕실이 독점하고 나아가 스스로 경영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거했고 장보고 제국을 이어받아 해상무역에 필요한 생산력을 유지하고 계승해나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산관계에서는 커다란 패착을 두었던 것이다. 바로 골품제 신분제 노비에 의존한 생산관계에서는 제대로 된 경쟁력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골품제를 강화하고 신분제를 강화하여 신라귀족들의 기득권을 보호 유지하고자 하는 한, 장보고의 청해진을 이어받은 새로운 세계는 결코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급속히 몰락했다. 875년에서 885년 사이의 신라 헌강왕 때의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扵海内比屋連墻, 無一草屋. 歌不絶道路, 風雨調扵四時.


  제49대 헌강대왕 때(875~885)에는 경주에서 동해안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 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순조로웠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그야말로 초가가 하나도 없는 경주를 만들었을까? 하루 아침에 가능할까? 지금까지 아무도 그 해답을 내놓은 학자들이 없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경주가 100만 도시였다고 커다란 모형을 전시해놓고 자랑하기에 바쁠 뿐, 그것을 가능케 한 물질적 경제적 토대나 원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기록상으로 청해진제국의 사람들을 벽골제로 강제이주시키고 완도를 공도(空島)로 만든 이후에 신라 경주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청해진을 혁파할 때 10만에 이르는 청해진 사람들을 다른 섬이나 고립된 지역으로 옮기지 않고 김제 벽골제 저수지 제방공사장에 투입했다. 또한 이 공사로 인하여 얻어진 쌀(米)이 신라 경주로 흘러 들어갔다. 장보고의 돈과 청해진유민들이 생산한 곡식이 신라 경주에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신라 경주 100만이 무엇을 먹고 입고 어떠한 돈으로 초가집 하나없는 화려한 도시를 이루었을까? 어디서 돈이 나왔을까? 맨손으로 맨몸으로는 할 수 없는 대단한 경주의 모습이다. 경주사람들의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고, 사회경제적 물적 토대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도시의 규모이다. 그것도 875년의 기록이다. 경주 100만도시의 출발점은 ‘완도’이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이른다. 아무리 신라 전체를 뒤져봐도 장보고의 청해진제국과 완도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위대한 업적으로 길이 남아야 할 당위성을 가진 위대한 역사기록인 것이다. 하나를 더 보자! 삼국사기 889년 기록이다. 장보고의 소프트웨어를 취하지 않고 하드웨어만 욕심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三年國内諸州郡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所在盗賊蜂起.


  진성여왕 3년, 889년, 나라 안의 모든 주군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75년 신라 경주의 인구가 100만에 달하고 초가집이 한 채도 없고, 금입택이 있고,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았던 신라가 889년에는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신라로 전락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돈이 몰리는 곳에 사람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면 도시는 급성장한다. 결국은 ‘돈’이다. 돈이 유입되지 않는데 사람이 몰릴 이유가 없으며 나아가 도시가 형성될 수도 없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다. 광산촌, 어촌, 농촌 등등 돈이 돌지 않는 지역은 몰락하고 있는 현상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歌吹滿路 晝夜不絶”(춤과 노래가 가득 차고 밤낮으로 이어졌다)이라는 신라 경주가 불과 15년만에 “府庫虛竭 盗賊蜂起”(경주의 창고가 텅텅 비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의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신라 100만 경주를 만들었던 돈의 근원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생적이고 독립적인 물적 토대에 기인하지 않고 외부에 의존한 재화의 유입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돈줄이 끊어지자 도시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완도 청해진제국을 제외하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신라 경주 100만 도시를 만든 완도”


  대단한 완도의 저력이다. 바로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이다. 청해진제국이 벌어들인 돈이 경주로 몰렸기에 가능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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