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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주고 나만 똑, 떨어졌지요 동백꽃 울엄마 “난, 괜찮아”

고금면에서 완도읍으로 시집온 이동애 엄마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1.03.26 14:32
  • 수정 2021.03.2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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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열렬하게 사랑합니다, 동백꽃. 만약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말하길,‘왕국이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앞설 게다. 만약 그들이 말하길‘바닷속에 있다’고 한다면 고기들이 앞설 게다. 오히려 왕국은 너희 안에 있고, 또한 너희 바깥에 있다. 너희가 스스로를 알게 될 때 너희가 알려질 것이요, 그리되면 너희들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식들임을 깨닫게 되리라. 허나, 스스로를 모른다면 빈곤 속에 있는 것이요, 빈곤 그 자체이다.
고금면에서 완도읍으로 시집온 이동애 엄마는 땅바닥에 떨어져서도 누군가를 지켜보는 그 열렬한 동백꽃은 사랑의 예수님 같다고 했다.

 

"어떡할까? 어찌하면 좋을까?"
이제, 다시는 못 올지도 모를 천리길을 가야한다.
백옥처럼 새하얀 버선에, 난생 처음 신어보는 꽃신.
꽃신 안에 딱 떨어지게 들어가는 발이 그리 미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안 가면 안되나요?"
"자고로 여자는 어릴 땐 아버지를, 커서는 남편을, 늙으면 자식을 따르는 법이라 했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다신 올 생각 마라!"
매정한 친정아버지. 떠나는 딸을 보고 친정엄마는 행여나 딸이 울까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여 가라며 손짓만 하다가 딸이 등을 돌려 사라지는 순간, 곧장 뒤켠으로 달려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감춘다.


남의 집을 가야하는 시간.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나의 집이 돼 살아야할 그곳으로.
몇 번을 돌아봤는지 모른다. 발걸음은 천리길인데, 도착한 건 왜 그리도 빠른지. 그곳에 뿌린 눈물은 또 얼만큼인지. 시댁에 이르러서야 눈물이 멈췄다.
그때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동백꽃.
그것도 흙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던 동백꽃이 말을 걸어온다. “너, 오늘 시집 가냐?”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된지, 너도 나처럼 될끄다!”하는 것 같았는데, 자신의 처지랑 비슷한 것이 엄마는 나무에 피어난 꽃보다 땅에 떨어져서도 꽃을 피우고 있는 동백꽃에 더 마음이 갔다.
4남 4녀 중 맏딸, 옛 사람들이 그렇듯 첫선이 곧 결혼이 돼 버린 이동애 엄마.
작은 체구에 거친 손등이었지만 환한 웃음만큼은 열여섯 소녀보다 부드러운 이동애 엄마(84)다.


엄마에게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일은 역시나 자식 일이었다고 했다. 자식들이 어릴 때만해도 집안은 지지리도 가난했었다고. "아들이 장성해 자기 딴엔 집안을 돌보겠다고 어느 날 외입을 나갔는데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웨이터를 하고 있단 소식을 들었지라"
"누군가에게 그 소식을 듣는데, 진짜 면도날로 생살을 저밀 듯 가슴이 너무 아파옵디다"
아들을 친동생처럼 아끼던 동네의 형에게 말했더니, 그 길로 올라가 아들의 손을 잡고 내려왔단다.
"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반쪽이 다 된 아들의 얼굴을 보니,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집디다"


아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줄곧 반장만 했고 3년 내내 장학생으로 납부금을 면제 받을만큼 똑똑했는데, 가정이 어려워 더 이상 학교를 보내지 못했다고.
졸업 후 공장도 다니고, 친구들 꼬임에 더 많은 돈을 벌어 보려고 다단계회사까지 다니며 그렇게 애를 쓰다가 결국엔 웨이터 생활을 하게됐다는데,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와 여자 하나 잘 만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니 “그때는 너무 기뻐서 정말 많이 울었재!”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는데, 엄마는 슬하에 1남 2녀의 자녀를 뒀고, 아버지는 20여년 전 사별했단다.


큰 딸은 평범한 주부이고, 둘째 딸은 사위와 함께 경찰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엄마의 삶은 굴곡보다 더한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보냈다고 했다.
자식을 키우는 일, 먹고사는 일 모두가 엄마의 몫이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시집 와 내 육신으로 돈을 버는 일 말고는 도움 받은 게 없었단다.
홀로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일로 생계를 꾸렸는데, 지금은 크레인으로 무거운 짐을 날랐지만 엄마 때는 손수 머리에 이고 날랐다고.
섬에서 섬으로 양곡을 나르는 일이 엄마의 돈벌이수단이었는데, 당시엔 대형트럭에서 쌀가마니를 내리고 배에 싣고 다시 섬으로 이동해 나르는 일을 그 작은 체구의 엄마가 감당해야만 했단다.


엄마의 몸무게에 육박하는 쌀가마니를 하루 종일 머리에 이고 날랐으니 얼마나 고달펐을까?
“그 땐 눈에 뵈는 게 없었지, 오직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 생각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뿐이구”
지금도 기억난단다. 일할 때 가끔 샛거리로 빵과 사탕을 주는데 그것도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 자식들에게 주면 아이들이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게 또 하나의 낙이라서 샛거리를 한 번도 먹어 본적이 없었다고.
끔찍한 사고도 당했다고 했다. 한 번은 쌀가마니를 배로 싣던 중 그만 발을 헛디더 추락하면서 목뼈가 부러지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는데, 병원에서 큰 수술을 하면서 이렇게 삶이 박복할 수 있을까하며 한없이 울었단다.


그럼에도 엄마의 눈에 밟힌 건 자식뿐이었기에, 오뚜기처럼 일어나 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고.
“그 후로도 미역공장 줄기찟기, 연탄배달 등 이 몸뚱이로 안 해본 일이 없었지. 그래도 어려울때마다 힘이 되어 준 건 내 자식들이었지, 내가 고생했으니까 자식들이 이 만큼 잘 됐고, 난 그걸로 만족해”
홀로 생계를 책임진 엄마를 보면서 아버지의 삶이 궁금해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그러자 말문이 막히는지 엄마가 한참을 머뭇거린다. 
“착한 분, 정도 많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착한 사람이었어”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공부도 참 잘했단다.
그런데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완전 다른 사람이 돼 돌아왔다고. “젊어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양반이 뜻대로 잘 안풀리니 아마도 그걸 술에 의지하려했던 것 같애.”
그렇게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술을 끊게 됐는데,  그날이 바로 아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온 날이었다고.
"평소 말이 없는 양반이라 며느리를 봐도 좋다는 내색을 안하시더니, 며느리를 보고부턴 일체 술을 입에도 대지를 않아"
그런 모습이, 아버지의 사랑 같다고.


손주 재롱에 막 재미를 들려던 순간,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다고했다.
남편을 원망하진 않는단다. 어려웠던 시절 다 이겨내고 지금의 좋은 세월을 함께하지 못해 아쉬움만 더한다고. 
요즘 엄마의 소일거리는 공동텃밭을 가꾸는 일. 배추도 심고 무도 심고 요즘엔 콩까지 심었다. 이 또한 자식들의 반찬거리를 만들어 줄 요량이다.
그렇게 평생을 주고 또 줘도, 살아있는 동안 자식에게 또 주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인가 보다.
요즘 재미 중에는 자식과 소통하는 게 가장 제일 재밌다고 했다. 퇴근시간이면 걸려오는 아들 전화에 “아들 사랑한다”라는 말을 꼭 들려준다는데,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아름다운 말인지 이제야 알았다면서 남은 여생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예전 그 질곡진 삶, 그땐 어디 사랑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죄다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있겠는가. 그 한 마디를 가슴 속 가장 깊은 용광로에서 녹여내며, 녹지 않은 그 뜨거움은 도저히 뱉어낼 수 없어 가슴에서 목구멍까지 수천 수 만번 타오르면서 쌀 한가마니를 이고 뱃전을 오르던 엄마.

 

우리 엄마 언제 오시나!
해는 한참 전에 저물었는데,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숙제를 다 하도록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타박타박 발소리 오늘은 안 들리네,
양철 지붕 위로 내려오는 고요한 빗소리
빈방에 혼자 누워 엄마 오기만 기다리던 먼 옛날
지금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엄마 걱정...

꿀은 아들이, 꽃잎은 딸이
향기는 손자가 다 가져가고
나만 혼자,
똑! 떨어졌지요
동백꽃 울엄마 "그래도 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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