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가리포상 대장군과 이혈총통이 대변해

[기획] 완도 고금도 통제영의 전략적 가치 1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3.05 11:30
  • 수정 2021.03.05 11:32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은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왜구들이 부산포로 처들어와 불과 2개월만에 한반도 전국토를 유린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하여 조선을 떠날 준비까지 하였다. 그해 12월 중국 명나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논리를 내걸며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 대항하여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논리로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이어 다시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에 선조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며 내내 감사해 했고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는 더욱 극성을 부리고 조선의 지배논리로까지 확장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속된 강화와 전쟁으로 전국토는 황폐화 되었으며 전국민은 그야말로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러한 지난한 왜구의 침략이 1598년 7월 24일 명나라 진린도독이 완도 고금도에 본영을 차리고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함께 본격적인 왜구격퇴의 행보에 나선다.


그러한 결과 왜구들과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게 되고 진린도 어쩔 수 없이 진정어린 이순신의 읍소에 감동하여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대전투를 치루게 된다. 이른바 노량해전이다. 1598년 11월 19일 여수 묘도 앞바다와 남해 사이에서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하게 되고 이른바 임진왜란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완도 가리포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1598년 11월 숨지기까지 이순신의 조선수군 경력은 완도에서 시작하여 완도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순신의 전부는 완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과 함께 그 삶을 함께 한 위대한 영웅이다.


또한 그는 그러한 과정을 자신의 일기에 그대로 기록했다. 이른바 ‘난중일기’이다. 그러나 명량해전을 겪고난 후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기고 난 이후의 기록은 전무하다. 1598년 3월 18일 이후의 고금도의 기록은 단 한 자도 남아있지 않다. 시시콜콜한 가족사이며 상관이었던 원균의 태도 하나하나까지 비판했던 이순신이 고금도에서의 행적에 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은 ‘난중일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해서 다시 말해 기록이 없다고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기고 고금도를 본영으로 하여 출전하고 왜구와 싸웠다는 것은 분명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록이 없다고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 니다. 완도의 고금도 통제영이 역사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고금도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다는 것이고 이순신에 치우친 임진왜란의 역사가 난중일기에 고금도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한 까닭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순신이 전사하고 전쟁은 끝났다.  전쟁은 일방적인 중국 명나라의 승리로 귀착되었다. 1644년 명나라는 망했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재조지은이라는 사대사상은 제왕학은 물론 조선의 통치논리로까지 발전하여 명나라를 부정하는 것은 배은망덕이자 이단이며 나아가 척사의 대상으로 성리학이라는 학문의 기초에 깊숙이 들어앉아 전 조선을 휘감아버렸다. 어느 누구라도 이 성리학이라는 지배논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기초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1795년 정조19년에 규장각 문신이자 정조의 오른팔이었던 윤행임에게 지시하여 ‘이충무공전서’를 편찬 간행하게 하였다. 그야말로 재조지은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의 연유를 밝히고 탄보(誕報)함을 널리 알린다는 취지로 이충무공전서를 발행하였다. 여기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자료로 기록되고 오늘까지 전승되어오고 있다. 여기에 이순신이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기고 난 이후의 기록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난 이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았다고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순신의 일기인 난중일기를 보면 망궐례를 지낸 사실, 조선왕실에 대한 제사 및 소소한 잡다한 행사까지 기록하고 술 마시고 토하고 기운을 못차리고, 활을 쏘고 나아가 상관이었던 원균에 대한 원망까지 서슴없이 기록했던 이순신이 왠일인지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기고 난 이후의 기록은 아예 없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금도 이후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난중일기에서 조선임금에 대한 원망이나 혹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조선왕실에 부담을 줄 내용이 있었기에 윤행임이 난중일기의 기록을 아예 빼버렸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나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의 이야기가 이른바 정조가 강조하고자 하는 ‘재조지은’과 ‘탄보’ 나아가 ‘존주(尊主)’사상을 위협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삭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과거의 조선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새롭게 명나라를 이어받아 세계의 중심으로 다시 서고 있다는 존화의식(尊華意識)이 발현되고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이어받은 새로운 중심이라는 논리가 팽배해 있었고 이 지배논리의 집약판이 이충무공전서와 임경업전, 김덕령전 등으로 표출되었다. 기록이 없다고 역사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완도의 위대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완도를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사실자체가 그대로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미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가리포상 대장군전>과 <가리포상 이혈총통>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도 완도의 위대한 전략적 가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행간을 읽어 완도의 진정한 가치를 기록과 증거물을 통해 논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도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전략적 가치가 완도에서 숨겨져 있으며 기록이 없다고 방치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 학자들이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계속)


완도문화원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