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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 설진 500주년 기념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의 탄생 ‘가리포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2.05 11:24
  • 수정 2021.02.0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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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 「진보」조에 “중종 17년에 왜구의 요충지에 진을 처음 설치하였으며 달량수진을 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 「강진현」 「관방」조에는 “금상(중종) 16년에 왜구의 요로이므로 비로소 진을 설치하고, 첨사 한 사람을 두어 달량의 수군을 병합시켰다”라고 되어 있기도 하나 다른 대부분의 기록들에서는 17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17년을 따른다.라 하여 1522년(중종 17) 가리포 수군진이 탄생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초대 수군첨절제사(약칭 첨사)로 이반이 도임하였다.
『만기요람』에 보면 일본과의 해로에 대한 설명이 있다. 「통문관지」, 「왜기」, 「김세렴풍향기」 등을 인용하여 바닷길 사정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그중에 「이항복왜구대책」도 있는데 그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 

“평상시에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는 왜적 중 그 태반이 이 섬 사람(오도 사람)이며, 그들이 들어오는 길은 ①오도에서 동남풍을 타고 삼도로 와서 밤을 지내고 선산도를 지나 바로 고금도와 가리포 등의 방면으로 들어오며, ②대마도에서 동북풍을 타고 연화도와 욕지도의 사이에 이르러서 밤을 지내고 곧장 남해의 미조·방답 등 지방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전라도로 입구하는 데 익혀진 수로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두 바닷길 중 ①이 늘 뜻밖에 일어나며 ②는 언제나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하면서, 전라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고금도의 앞면을 점령하여야만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수군진을 보다 전진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전진 배치에 적합한 곳이 바로 가리포였다.

이렇게 가리포는 왜구를 방어하는 전진기지로서의 요충지였기에 진이 설치되었다.

을묘왜변과 가리포진
1555년(동 10)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급히 보고하기를 “5월 11일에 왜선 70여 척(군사 약 6천 명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1589) 8월 1일 2번째 기사. 한 척당 1백 명 정도로 추산.
)이 달량 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저의 민가를 불태워 버리고 드디어 성을 포위했다.” 고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묘왜변(또는 달량진왜변)이었다. 

당초에 왜선 11척이 바다 섬 가운데 나타났다가 마침내 육지로 상륙하여 더러는 호각을 불며 불을 놓고 더러는 창을 휘두르며 칼을 빼들고 덤비므로, 가리포첨사 이세린이 즉각 병사 원적에게 치보하자, 원적이 장흥부사 한온, 영암군수 이덕견과 함께 나아가서 구원하려고 달량으로 달려갔다가 포위되었다.

군대가 무너져 모두 죽고 이덕견은 사로잡혔다. 적이 난마도, 가리포 등의 진영 및 장흥, 강진 등의 고을들을 연달아 함락시키고, 수사 김빈과 광주목사 이희손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해남현감 변협이 외롭게 성을 지켜 홀로 보전하였다. 도순찰사 이준경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고, 김경석과 남치근을 좌우방어사로 삼았다. 김경석이 영암성에 주둔하였는데 적들은 성 밖에까지 바싹 다가오고 또 나머지 적은 나누어 이웃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때마침 전주부윤 이윤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군사를 잘 기르고 격려하였다. 김경석이 출병해 싸우니 적은 대패하여 도망쳤다. 관군은 적의 수급을 2백여 넘게 참획하였다. 남치근은 나주에서 적을 차단하고 나아가 싸워 부수었다. 이덕견이 적의 진중에서 돌아와 남치근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적에게 군사의 먹을 것을 준다면 마땅히 퇴환할 것이오”하니, 이덕견의 목을 군중에서 베어 돌리도록 명하였다. 후퇴하여 도망치던 적들은 또 제주에 침범하여 성 밖에 주둔하였는데, 목사 김수문이 고군으로 힘껏 막아 그들이 퇴각하기를 기다려 추격하여 크게 부수었다. 

이때는 가리포진이 설치되고 달량진이 이속된 지 3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따라서 달량진에서 일어난 왜변의 일차 방어 책임자는 가리포첨사였다. 그러나 대규모의 왜침을 막아내기에 가리포진은 아직 역부족이었다. 순찰사 이준경의 계본을 보면, 
“5월 27일에 왜선이 가리포에 와서 정박하자 첨사 이세린이 외롭고 약하여 지탱할 수 없겠다고 여기고 성문 밖으로 나가 산에 올라가 진을 치고 막았는데, 28일에 적이 성 안으로 들어와 행영의 대청 및 군기·군량 창고들은 모조리 불지르고 병선을 태웠으며 더러는 빼앗아 갔습니다. 회령포로 옮겨가 정박하니 권관 노극정이 또한 성문 밖으로 나가 그들의 선봉을 피했는데 적들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가 성으로 넘어들어가 드디어 불태웠습니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1555) 6월 8일 1번째 기사

이 싸움은 가리포·회령포·녹도 일대에서 벌어졌다. 대부분의 장수들이 머뭇거리면서 두려워하여 분연히 추격하지 못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멋대로 여리를 분탕하고 성읍을 함락하여 많이 살해하고 약탈하게 하였으므로, 모든 백성들이 그 원망을 장사들에게 돌렸다. 남치근·김경석·조안국은 모두 서로 각립하였고 그 휘하 군사들도 서로 헐뜯어 시비가 분분하였으며, 군정에 체계가 없어 민심이 통일되지 못하였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순찰사도 첨사도 모두 피하기 급급했다고 한다. 당시 사신은 이에 대해 비변사의 책임을 묻고 있다.
8월 3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가리포는 지원이 어려운 절도에 있기 때문에 성을 지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순찰사의 치계에 따라 군량과 군기를 처치한 다음 진을 비우고 나오게 하소서. 첨사 이세린은 적을 만나 성을 버리고 숲속으로 달아나 숨어 버려 공해를 모두 불타게 했고 군량과 군기도 아울러 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으니, 진을 버린 죄는 피할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치죄하소서.“ 『명종실록』 라 하였다. 가리포를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첨사에게 진을 비우고 나오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첨사의 죄를 묻고 있다. 이세린은 가리포첨사로 있으면서 성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적도에게 군기와 병량을 모두 빼앗기고 관사를 태워 없애게 하였다고 하여 처벌받았다. 『명종실록』 

을묘왜변으로 가리포진의 역할이 제주 방어보다 가리포를 비롯한 주변 방어가 더 우선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제주 바닷길 방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가리포진은 역할이 추가되면서 점차 그 규모를 키워갔다.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 제일의 요충지
가리포진은 1555년 을묘왜변을 당하고 난 후, 진성을 보수 확장하고 병력을 증강하면서 조선에서 가장 큰 수군진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순신이 정유재란 직전인 1596년(선조 29) 윤8월 24일, 가리포에 와서 부찰사 한효순, 우우후 이정충과 함께 남쪽 망대(남망봉 해발 150m)로 같이 올라가서 보고 “좌우에는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호남의 제일 요충지이다[眞湖南之第一要衝也].”라고 하였다.
 이 말이 가리포진의 위상을 결정 짓는 상징적인 문구가 되었다.

주진-거진-제진의 진관체제로 구성된 전라도 수군 편제를 보면, 우수영과 좌수영에 주진이 있고 임치도진과 사도진이 거진, 그리고 나머지가 제진이 되어 위계를 구성하였다. 아직 가리포진은 신설 전이었다. 이후 신설되었을 때 가리포진은 제진으로 거진인 임치도진관에 소속되었다. 
그러다가 숙종년간에 우도는 위도(와 가리포 두 개의 진이 거진이 되었다. 위도에는 임치·고군산·산목포·다경포·법성포·검모포·군산포·신도의 여덟 보를, 가리포에는 고금도·남도포·금갑도·어란포·이진·신지도·마도·회령포의 여덟 보를 소속시켰다. 위도와 가리포 두 진은 양남 수로의 인후였으므로 전라도의 감사와 수사에게 순의하여 이렇게 진관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가리포진의 위상은 대폭 강화되었다. 『숙종실록』  숙종대 수군진이 증설되었다가 이후 일부를 혁파하면서 이를 「양남진보변통절목」으로 정리하였다.

가리포는 후에 신자과 『승정원일기』 고종 3년(1866) 11월 15일[13] 영종도 첨사를 신자과로 시행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가 되기도 하였다. 1780년(정조 4)에 여종주가 고군산첨사로 임명받았는데, 정조가 “그대가 공로를 바친 것으로 말하면 짝할 사람이 없다. 이제 가리포첨사와 서로 바꾼 것은 공로에 보답하는 뜻을 보여줌으로써 고무시키려는 것이다.” 『일성록』 정조 4년(1780) 12월 22일[01] 라 하여 가리포첨사로 바꿔주었다. 이는 같은 거진이라도 가리포첨사가 고군산 첨사보다는 높은 지위였음을 말하여주는 근거가 된다. 철종대에는 병조판서 홍종응의 청에 따라 “완도를 독진으로 만들어 (첨사를) 가려서 차임하여 보내고, 전최는 순영에서 하게 하여” 그 위상을 강화하였다. 이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진과 해남의 사이에 완도가 있으니, 옛날에 청해영이라 일컫던 곳으로 우수사의 행영입니다. 해방을 맡아 관리하는 최고의 요충지로 일본과 인접하여 순풍이 한 번 불면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첨사를 두었으며 … 충무공 이순신이 참으로 호남 제일의 요충지라고 말하였으며, 그 가까이의 대여섯 섬의 진을 모두 본진에서 관할합니다.”  196대 첨사 홍선이 독진 승격을 기념하여 이순신의 말을 빌어 ‘호남제일번’이란 현판 휘호를 써서 객사 입구문에 걸었다. 가리포진은 이렇게 6개의 진을 거느리는 최대의 거진이었다. 주진인 좌수영이 거느린 진이 5개였으니 그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가리포진에는 거북선도 있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전라우수영에는 모두 5척의 거북선이 있었다. 나주에 2척이 있었고, 가리포, 마도, 신지도에 각각 1척씩 있었다.
그런데 마도와 신지도는 모두 가리포 진관이기 때문에 가리포진은 실제로 거북선 3척을 관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또한 가리포진의 위상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일 것이다.

청산도진과 진도방어영의 설치
그 후 19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황당선이나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고 상대적으로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면서 해안 방어의 상황이 달라졌다. 이에 따라 진관 구성도 달라졌다.
외양 방어를 위해 1866년(고종 3)에 청산도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금도·신지도·마도·소안도 등 네 개의 진을 모두 청산도진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가리포 진관이었던 고금도·신지도·마도가 청산도 진관 소속으로 바뀌었다. 

좌·우수영의 경계를 나누는 곳
조선시대에 전라‧경상‧충청은 이를 각각 좌‧우도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이때 좌‧우도의 기준은 서울이었지만 그 소속 군현이 항상 같지는 않았다. 『증보문헌비고』의 구분에 따라 현 전라남도 서남해의 행정구역만을 보면, 좌도에는 장흥·순천·낙안·보성·광양·흥양 등이, 우도에는 영암·영광·함평·고창·무장·무안·진도·강진·해남·제주·대정·정의 등이 각각 속하였다. 그런데 강진의 경우 『증보문헌비고』나 『탁지지』에는 우도로 편제되어 있는데 18세기 중엽 발간된 『호남지도』에는 좌도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렇듯 강진은 우도와 좌도로 그 소속이 오락가락하였다. 이에 따라 가리포진의 소속도 달라졌다. 기록을 통해 그 이동사정을 정리해 보자. 
1686년(숙종 12)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유의 장계에 따라 강진의 경내에 있는 네 진, 즉 가리포·마도·신지도·고금도 등을 좌수영으로 소속을 옮겼다. 1690년(동 16)에는 어사 심계량이 별단에서 왕래하는데 폐단이 있다고 하여 도로 우수영에 예속시켰다. 왕래하는 폐단이란 육로로 왕래할 때 강진의 진들은 우수영이 좌수영보다 더 가깝기 때문에 좌수영 소속이 폐단이 된다는 것이었다.

강진 자체가 좌도와 우도로 그 소속이 바뀌곤 했는데 가리포를 비롯한 강진 관할 네 개의 진도 오락가락했다. 이처럼 가리포는 전라도의 좌계와 우계를 나누는 경계에 있으면서 서로 관할을 요청할 만큼 비중 있는 곳이었다. 『일성록』 정조 원년(1777) 4월 5일[05], 좌수영으로 네 진을 이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시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국역 비변사등록』 158책, 정조 1년(1777) 4월 6일,  

하지만 가리포가 주로 우수영에 속하였기 때문에 우수영이 좌수영보다 압도적으로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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