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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와 제나라(19회)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1.22 11:12
  • 수정 2021.01.2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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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당나라에서 절도사는 8세기 초에 처음 임명되었다. 741년부터 742년까지 10명의 절도사가 처음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군사와 민정을 겸한 강대한 지방 세력으로 ‘번진’ 또는 ‘방진’ 등으로 불렀다.

 당나라 말기에 절도사는 관할 구역에서 군사, 재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힘이 생긴 절도사들은 차츰 자립의 움직임을 보였고, 왕명에 따르지 않고 자식들에게 지위를 세습하면서, 세금을 걷어 중앙정부에 바치지 않고 자립경제를 꾸려나갔다. 

 당 황제는 당시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치청절도사 이희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라는 긴 이름의 벼슬을 내리면서 ‘정기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이 직책 속에 신라와 발해 양번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신라 및 발해 양국과의 교역 및 교민들에 관련된 업무 그리고 사절의 왕래와 관련된 대외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인 것 같다.
 당시 이정기가 관할하는 산둥반도에는 당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절반에 차지하는 거대한 염전이 조성되어 있었으며, 당나라 전체 곡물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정도의 비옥한 농토가 있었다. 

 당시 발해와 신라의 조공과 교역은 서해를 통해 이정기의 지배영역인 산둥반도와 연결되었다. 그러므로 이정기는 이 항로를 관할하면서 막대한 무역이익을 얻게 되었다. 발해와 신라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정기는 산동일대의 10개 주를 확보하고, 775년에는 당나라 요충지인 서, 조, 박, 예, 운 5개 주를 더 얻어 15개 주를 차지하므로 절도사로서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이정기는 10만 이상의 군사력, 84만 호 54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확보해 절도사로는 최고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큰 힘을 가지게 되자 이정기는 당 조정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면서 나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나 암에 걸려 아들 이납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죽었다.  아버지 대신 절도사의 자리에 오른 이납은 782년 11월 국호를 ‘제濟’라 칭하고 조정 대신들을 임명한 후 나라의 모습을 갖추고 왕위에 올랐다. 

 당 황제는 나날이 세력이 커가는 이정기의 제나라 토벌을 위해 무령군을 창설하였으며, 당나라 11대 황제 헌종은 이정기의 제나라 토벌을 위해 818년 신라에 지원요청까지 하였다. 신라는 이에 응하여 군사를 파병했다.  819년 신라에서 파병된 군사와 당나라 군사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공격하자 제대로 항전하지 못하고 운주성으로 쫓겨 갇히고 말았다.
 운주성에 갇힌 채 항복하자는 파와 계속 싸우자는 파로 나뉘어 다투게 되었다. 결국, 이사도는 항전하자는 파의 한 사람인 유오의 손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이정기와 그의 후손이 지켜온 제나라는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후예가 건설한 ‘제’나라는 종말을 고했는데, 제1대 이정기(765~781), 제2대 이납(781~792), 제3대 이사고(792~806), 제4대 이사도(806~819)로 4대를 이어갔다. 고구려 멸망 100년 후인 765년부터 819년까지, 고구려인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55년간에 걸쳐 산둥반도에서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장안의 당 황제와 대립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오해가 생겼다. 같은 동포로서 고구려가 세운 제나라를 신라인인 장보고가 멸망시켰다는 부분 때문이다. 그러나 이정기는 그의 부하 손에 의해서 암살당했지 장보고 손에 의해서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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