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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왜 당나라로 건너갔을까?(15회)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2.23 10:03
  • 수정 2020.12.2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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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왜 중국으로 건너갔을까? 이 부분도 명확히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아 추론에 의존할 뿐이다. 

신라 하대에 들어 중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장보고는 이들 중 하나의 이유로 도당 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첫째, 기근을 피해 자활의 길을 찾아 당나라로 갔다는 주장이다.

9세기 초 헌덕왕(809~826) 시절 기근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14년부터 매년 큰 홍수와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며, 815년에는 서쪽 변방의 주(州), 군(郡)에 기근이 들었다. 이후 816, 817, 820, 821년등 계속하여 기근이 들었다.

백성들은 수탈과 계속되는 기근으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당나라로 구걸하러 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16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 절동지방으로 170명이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당나라에서 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제압할 출병을 요구하자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甲兵)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집압을 돕도록 하였다. 

이런 국내외의 모순이 누적되면서 헌덕왕 14년(822년)에는, 김원창이 37년전에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 대신 원성왕이 즉위한 것이 불법이었다고 웅천주의 치소(治所)를 본부로 반란을 일으켰다.

속일본후기에 기록된 ‘보트피플’도 이때의 일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배를 타고 인근 나라로 살기 위해 떠났던 사람들이 있었다. 즉 ‘보트피플’이 있었다.

속일본후기에 의하면, 기근과 막중한 세금 부담을 이기지 못하여 811년 8월부터 824년 5월까지 13회에 걸쳐 모두 826명이 일본으로 갔다고 적혀 있다. 이때 살아서 일본에 도착한 사람들의 숫자가 826명이었는데, 항해 도중 표류하다 죽었던 사람들의 숫자는 과연 얼마였을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들이 ‘보트피플’이 시초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장보고도 이들처럼 기근을 피해 자활의 길을 찾아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인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둘째, 골품제 때문에 실력이 있어도 출세의 길을 보장받을 수 없어 당나라로 갔을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신라에서는 현재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골품제 때문에 실력이 있어도 출세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통일신라 ‘3최’라고 불리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세 사람이다. 

이들 세 사람은 당나라에 유학까지 하였던 실력가들이었지만 골품제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였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최치원은 경주최씨의 시조로 중국에서 황소의 난 때 유학하였던 사람이다. 유학 중 그가 쓴 시를 당나라에서는 기본 교양으로 삼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로 돌아왔지만, 골품제 때문에 마땅한 직책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라를 떠나지 않고 평생을 신라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최치원의 호를 ‘고운’ 또는 ‘해운’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부산 ‘해운대’라는 명칭이 최치원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최치원의 사촌 동생인 최언위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신라 사람으로 당나라 문과文科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골품제 때문에 마땅한 직책을 갖지 못하자 고려로 가 왕건의 부하가 되었다.

최승우는 당나라에서 외국 유학생들이 보는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뒤 관직에 있다가 귀국하였다. 하지만 골품제 때문에 출세할 수 없자 후백제 견훤에게 가서 책사로 활약하였다. 

셋째, 장보고와 관련이 없지만,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서 진골, 성골들의 귀족들이 늘었지만 마땅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어 귀족 사이에 정쟁이 일어나는 등 중앙정부의 정치적 혼란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당나라로 건너간 귀족들이 많았다. 

장보고는 아무리 무술이 뛰어나도 출세할 수 없었던 신라에서, 신분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나라를 선택했던 것 같다.

그는 당에서 그의 무예를 인정받아 무령군중 소장이라는 직책에 오를 수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당 드림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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