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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성씨와 자제들(14회)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2.18 11:15
  • 수정 2020.12.1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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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성(姓)에 관한 우리나라 학자들의 발표를 보면 삼국사기에 근거하여 측미한 집안으로 성씨를 갖지 못한 하층계급이었으며 활을 잘 쏜다 하여 궁복 또는 궁파로 적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장보고와 정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두목이 쓴 ‘번천문집’이다. 이 번천문집(권6)에 ‘장보고 정년전’을 별도로 집필하면서, 두목은 장보고와 정년 두 사람의 성씨를 분명하게 적고 있다. 

궁복 또는 궁파는 우리 사서의 기록일 뿐 중국에선 장보고張保皐라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고, 특히 일본에선 이름의 뜻을 높여 장보고(張寶高)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궁복과 궁파라 한 우리나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태도는 장보고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여진다. 즉 신라 왕실로부터 반역자로 낙인찍힌 장보고에 대한 신라 왕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번천문집에 의하면 정년은 장보고와 고향이 같으며, 당나라로 건너간 것도 함께하였다. 그런데 정년에게는 정(鄭)이라는 성(姓)이 있고 장보고에게는 성(姓)씨가 없었다는 주장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학자들은 신라 시대에는 장張씨라는 성이 없었고, 장(張)씨의 시조들은 대부분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장보고는 성이 없었으나 중국에서 장(張)씨라는 성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진국의 성씨를 조사했던 서울대 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장(張)씨는 고구려 시대부터 존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송기호 교수는 발해국지와 신당서, 구당서를 비롯하여 각종 사료와 외교문서에 남아있는 대진국(발해) 지배층 성씨를 조사 분석한 자료를 보면 이미 신라에도 장張씨가 있었다는 주장을 편다.

대진국 성씨 조사대상 380명 중 왕족인 大씨가 117명, 高씨가 63명, 李씨가 21명, 張씨가 20명 기타 성씨가 134명이었다.

이중 확실하게 밝혀진 유력한 귀족 성씨는 高씨. 李씨, 張씨, 양씨, 두씨, 吳씨들이다(KBS 역사스페셜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 2005년 11월 25일 방영).

대진국은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 만큼 장(張)씨가 적어도 고구려 시대부터 나라의 대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장(張)씨들이 백제에도 많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며, 장보고 집안 또한 백제가 멸망하면서 백제계 사람으로 장(張)씨 성을 가지고 완도에서 호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대진국은 고구려가 패망할 때 ‘후고구려’의 깃발을 세우고 일어난 대중상과 그 아들 대조영이 세운 국가다. 발해는 중국이 칭한 이름이고 본래는 대진국이다. 조선 중종 때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개화 27년(668년) 9월 21일 진국장군 대중상은 동모산에 성벽을 쌓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중광 32년(700년) 5월에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였다.”“태자 대조영이 2대 황제에 즉위하고, “새로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는데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천리가 개척되었다... 

장보고 자제에 관한 기록이나 설화는 그리 많지 않다.

속일본후기 인명천황편 842년 정월 초하루 자료를 보면, 신라인 이소정이 축자대진에 도착하여 “지난해 회역사 이충, 양원 등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곧 부하 관리와 죽은 장보고 자손들에게 남겨진 것이니 바라건대 빨리 보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에 자손들이라는 말이 있다.

또, 김해김씨 족보에 김수로왕 19세 손인 성해(星海) 옹의 배위配位(부인)가 장보고의 딸이라고 나와 있다. (19세손 김성해(金星海)호 해능(海凌) 자 군즙(君楫) 신라 헌안, 경문, 헌종 3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최고은(崔孤雲)과 함께 당나라에 가셨고 詩文에 능하셨다. 배위(配位)는 옥산장씨(玉山張氏)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따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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