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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어떤 사람인가? Ⅴ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0.23 10:30
  • 수정 2020.10.2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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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당나라와 일본에 있는 신라.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하나로 묶어 이들을 인도하였다. 장보고는 중국 최남단 광주로부터 명주, 소주, 양주, 초주, 연수현 및 산동반도의 문등현, 적산포까지 뿔뿔이 흩어져 서로 대립할 수 있었던 신라,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같은 민족으로 단결하여 상업과 무역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가 세웠던 제나라의 패망으로 사분오열되었던 고구려인과 백제인들을 중국 내에서 신라의 청해진과 연결한 거대 무역상들로 만들었다.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이정기는 타고난 무장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이정기는 이들을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은 틈을 이용하여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761년. 고구려인 정예군 2만 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에 상륙하였다. 고구려 정신이 살아 있던 2만 병력은 10여 만의 당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777년에 이르러서는 서주등 5개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781년, 이정기는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과 장안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가 점령해 버리니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하여 20만의 대군으로 총진격을 개시하던 중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이정기가 죽었다. 

다음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하여 황제의 위에 올랐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꿋꿋이 제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올랐으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왕위에 올랐다.

당 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국 공격을 명하였다. 또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 번의 가슴 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의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제국이 망한 뒤 장보고는 제나라 주축을 이루었던 고구려 사람들과 백제 신라 사람들을 신라방으로 모아 그들을 보살폈다. 그들을 돌보던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무대로 동부 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상의 왕이 되었다. 중국 천하를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열번째, 인의의 마음으로 사람을 포용하였다. 

해적에 잡혀 노예로 팔려오는 동포들을 보고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귀국한 동포 사랑은 당나라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일으켜 두목이 번천문집에 ‘장보고 정년전’을 별도로 집필하도록 하였다. 이 정신이 바로 우리 완도 사람들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500년 후 이순신을 도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일제 36년 동안 나라를 찾기 위해 구국혼을 불태웠던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장보고 대사는 어려운 환경에서 청해진을 찾아온 정년과 김우징, 김양 등을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김명이 희강왕을 자결하게 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불의를 참지 못하고 김우징에게 5000 군사를 주어 신무왕으로 옹립하게 하는 정의감, 이 모든 것이 완도 사람의 정신이다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이런 기록들은 일본 승려 엔닌이 구법 활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장보고 세력의 도움으로 구법을 마칠 수 있기까지의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일기는 일본대사로 부임한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에 의해 1950년대부터 연구하기 시작하여 1955년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장보고와 청해진의 역사적 의미가 우리나라보다 외국에 먼저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 장보고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쓴 서울대학교 김상기 교수가 ‘장보고야 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사를 지배 원리를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로 ’해상왕국의 건설자‘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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