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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과의 작별

[에세이 - 횡간도에서] 박소현 / 횡간도 보건진료소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0.16 10:30
  • 수정 2020.10.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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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간리 응급 헬기장 근처에 십여 그루 고목이 산다. 키는 전봇대 두 개를 이어 붙인 듯이 기다랗고, 어른 둘이 손을 마주 잡고 안아야 겨우 안길락 말랑한 너비인 것도 있다. 몇 해 전 의료사각지대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신속한 대처를 위해 외딴 섬에는 응급헬기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횡간도에도 헬기장이 들어서기로 했다. 수풀이 우거진 언덕에 부지를 선정하고 공사가 시작되자 당연히 첫 번째 일은 그 고목들을 포함한 나무들을 베어내고 평지로 땅을 고르는 일이었다. 순조롭게 나무를 베던 중 동네 어르신 한 분이 허겁지겁 달려오셔서 수목 업자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다 한다. “이 오래된 나무들을 왜 함부로 베는 거냐? 큰 나무 베어내서 마을에 안 좋은 일 생기면 네 놈이 책임질 거냐?” 아무리 미신이라고 설명해 드려도 미동 없으셔서 결국엔 고목 십여 그루를 남기고 헬기장이 들어섰다.

여러 해가 지나고 응급환자가 발생하여 여러 차례 헬기장을 이용하다 보니, 바람이 부는 날이나 야간에는 남긴 고목이 이착륙에 위험 요인으로 꼽히게 되었다. 결국 이장님과 마을 어른 몇 분이 반대했던 분들을 설득하고, 완도보건의료원에 상황을 보고 드리고 다시 수목 제거 작업을 해야만 했다.

나는 고목 제거를 반대했던 분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내가 어릴 적에 완도 동고리 학교 관사에서 살았던 때가 생각나더라. 겨울이면 어른들이 학교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들에 볏짚을 엮어 내가 덮고 자던 이불만 한 크기로 만들어 일일이 옷을 입혀 주었던 일도 생각나고, 또 그 나무숲에서 늘 작은 보자기를 아기처럼 끌어안고 하염없이 나무에 무언가를 간절히 빌던 진님이라 불리던 아주머니도 생각났다.

나 역시 아버지가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게 되면, 이사 가는 날 아침에 내 친구이기도 했던 나무들에 작별인사를 나누곤 했었으니.... 미신이라기보다 사람이 아니라도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연의 무엇이건 그 나름의 삶이 있겠거니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화요일 아침 배에 수목을 제거할 장비를 가지고 횡간도에 오고 있다는 업체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진료소 가까운 집으로 향했다. 평소 약주를 한 잔씩 하시는 아버님 댁이다. “아빠! 혹시 막걸리 있어요? 있으면 나 한 병만 주소.” 하자 소리내 웃으시기에 “오늘 헬기장 고목 제거하러 들어온다는데, 나무들 뿌려 주려고요. 이제껏 우리 횡간도 잘 지켜 주었으니 고맙고, 베더라도 서운해하지 말고 계속 잘 지켜달라고 부탁하려고요.” 말씀드리니 냉장고에서 큰 막걸리 한 병을 꺼내 주셨다.

이장님과 함께 헬기장에 가서 나는 속으로 저렇게 나무에 부탁했고, 이장님은 막걸리 한 병을 나무 주변에 부어주셨다. 아침 10시부터 시작했건만, 워낙에 두꺼운 나무들이라 쉽지 않았다. 크레인 차에 사람이 타고 나무 꼭대기 높이 만큼 올라가 옆 가지들을 잘라내고, 통나무는 사람 키 만큼씩 잘라내며 밀어서 넘어뜨려 내려갔다.

1시 무렵 갑자기 살랑이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며 잡고 자르던 나무가 반대 방향으로 넘어가 버려, 전기선을 건드려 불이 났다. 그 순간에 어찌나 바람이 불어대는지 눈 깜짝할 사이 불길이 위로 치솟으려 했다. 불이 붙은 곳은 다름 아닌 막걸리 주신 아버지 작업장 옆이기도 해서 자칫하면 큰 화재로 번질 수도 있었다.

작업장 소화기로 급히 큰불을 잡고 얼른 진료소에 달려가 소화기를 더 가져다 남은 불까지 모두 진압이 되었다. 결국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고목들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나도 놀랐지만, 어른들도 놀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무가 백 년을 넘게 거기서 살았을 텐데, 하루아침에 자기를 베어내겠다고 하니 화가 났었나 보다. 그래도 아침에 막걸리 부어주면서 빌어주어서 인명피해 없이 얼른 진압되고 무사히 작업 마친 게 아닐까? 

나무야! 비록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았지만, 그래도 우리 마을 잘 지켜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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