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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어떤 사람인가?Ⅳ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0.16 10:23
  • 수정 2020.10.1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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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무역용어가 ‘신라 말’이 되었다.

오늘날 영어를 모르면 세계 시장에서 무역을 할 수 없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일본, 중국, 샴, 페르시아 상인들까지 청해진에서 교역하도록 하므로 자연스럽게 ‘신라어’가 그들이 사용하는 무역용어가 되었다. 신라 말을 모르면 무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라어’가 중요하였기에 신라인 통역들이 많이 있었다.

신라인 통역은 일본이 중국에 보내는 ‘조공선(일본문헌 견당선)’에도 승선하였다. 조공선에는 신라 통역 외에도 배를 부리는 신라수수(新羅水手)를 배치하였다. 일본이 당나라에 파견한 견당선(조공선)은 총 12회였는데, 엔닌이 승선했던 선박은 제12차 견당선 4척 중 한 척이었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엔닌이 승선했던 제 1선의 신라통역 김정남이 “ 양주 굴항은 통과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이제 백수를 넘었으니 굴항을 통과한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신라 통역들은 통역 외에도 바닷길을 안내하는 암해자(항해사)역할도 하였던 것 같다, 제2선의 신라 통역은 박정장이었으며, 귀국 때의 신라 통역은 도현이 승선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승선했던 10등급으로 나뉘었는데 통역은 6등급으로 받는 보수는 명주 4필, 솜 20둔(屯), 베(布) 13단이었으며, 신라 수부는 10등급으로 보수액은 솜 4둔과 베 2단 외에 의복이 별도로 지급되었다. 이를 보면 통역의 대우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 수 있다.

여섯째. 당나라에서 신라방 사람들은 독립적인 치외법권을 누렸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산동반도의 문등현 자치기구를 ‘신라소(新羅所)’라하고, 초주와 연수현의 경우 ‘신라방’으로 되어있다. 엔닌 일기에는 신라소, 신라방 책임자를 ‘대사’라 했다. 엔닌 일행이 해능현에 처음으로 상륙했을 때 이들을 맞이한 당나라 관리를 “해능진 대사 유만”이라하여, 대사란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기본 법전인 ‘대당육전 권5 병부조’에도 “무릇 모든 군진의 대사와 부사 이상은 모두 겸인(시종)을 거느린다”고 되어 있으며, 이들의 임기는 4년제였다. 당나라에서 대사란 군진급 책임자에 해당하는 정규의 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등주 문등현 청녕향의 적산촌이나 모평현의 유산포에 신라방이 있었다. 이곳에는 신라인이 촌장을 맡아 지도하였으며, 적산촌과 초주·연수지방의 신라인 사회에는 각기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라는 특수한 행정기관이 있었다. 여기의 책임자를 압아(押衙)라 하였는데 신라 사람이 임명되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신라방은 당(唐)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838년 엔닌이 쓴 일기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당의 수도 장안을 비롯하여 중국 전역에 걸쳐서 거주하면서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신라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신라타운인 신라방을 형성하여 중국법이 아닌 신라인 대사가 적용하는 신라 법을 적용받으며, 법화원에서는 중국방식이 아닌 신라식으로 예불을 들일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에서 신라인으로 무령군중 소장을 지낸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일곱째. 월 주요 햇무리 굽 청자 기술을 도입하였다.

장보고의 무역품 중 중요한 것이 도자기이다. 강진군 대구면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간 청자문화나 완도, 신안, 무안, 해남 일대에서 발굴된 해저유물을 통해서 한, 중, 일 3국 간의 도자기 무역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완도 청해진에서 1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진군 대구면의 청자 도요지는 고려청자의 발생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청자의 원형은 중국도자, 즉 절강성지구의 명산인 월주요 청자로 짐작되고 있다. 신라 말 장보고 대사는 중국 절강성 영파, 항주 근방의 월주요(越州窯)의 해무리굽 청자 제조기술을 받아 들여 ‘신라청자’를 생산, 무역하기 시작했음이 최근 장도 발굴로 확인되었다. 즉 장보고대사의 근거지 였던 완도 강진 지역이 신라 말부터 우리나라 청자의 시원지(始源地)이다. 

따라서 고려 청자 10세기 기원설은 최소 1세기 이상을 앞당겨 9세기 신라 청자가 탄생하였다. 이는 장보고 선단의 공헌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여덟째. 신앙 의지처로 사찰을 세웠다.

산둥성 적산에 신라, 백제, 고구려 유망민들을 위해 법화원을 설립하고, 완도 상황봉에 법화사,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에 법화사, 절강성 천태산의 국청사, 일본의 적산선원 등은 장보고가 세우거나 세울 수 있도록 이바지하여 동포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사찰 건립목적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학자들 나름대로 견해를 발표하고 있지만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서’였음은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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