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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어떤 사람인가 2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9.25 14:44
  • 수정 2020.10.0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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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표준영정은 1979년 일랑 이종상 화백에 의해 그려진 작품으로, 비단에 채색된 가로 116.5cm, 세로 91cm의 규모 영정화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보고의 경우, 참고로 할 수 있는 이전의 초상화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에 이종상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졌다.

우리 역사 속 인물 중에서 업적에 비해 평가가 과장된 인물이 있는가 하면, 저평가된 인물 역시 많다. 그중에서 가장 저평가된 대표적인 인물이 장보고 대사다.

장보고 대사는 지금부터 1200년 전 신라의 철저한 골품제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한 혁명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라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고 당 드림에 도전하였다.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당나라로 건너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것이다. 

그는 신라라는 작은 땅에 머물지 않고 당나라로 건너가 신라, 일본, 당나라는 물론 멀리 서역까지 연결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한, 그야말로 글로벌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반만년 우리나라 역사 속에 한, 중, 일 동양 삼국의 정사에 실려 있는, 그것도 자신들 나라의 영웅과 비교하여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 사람은 오직 장보고 대사 단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평가 절하하면서 깎아내리기에 급급하였다.   21세기 신해양시대를 맞아 바다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이때 한국, 중국, 일본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장보고 대사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보고 대사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기에 다시 평가되어야 할까?

째. 장보고 대사는 동북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세계 최초로 해양상업제국을 건설한 ‘해상왕(海上王)’이다.

통일신라 시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남해, 서해, 남중국해에 들끓던 해적을 소탕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한 바다 개척의 영웅이다. 

장보고 대사는 청해진을 기반으로 무역형태를 바꾼 혁신적인 사람이다. 당시에 무역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관이 주도하여 국가 사이에 공식적으로 물품 교환이 이루어지던 ‘조공’과 다른 하나는 경제 발전의 필요에 의해 민간측의 사사로운 교역 이를테면 ‘사무역‘을 들 수 있다.

당나라와 신라의 공식적인 무역은 진평왕 43년(621)부터 시작되었으며, 희사품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주로 사신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신들이 가져간 물품을 객관 앞에서 판매하는 관시(官市), 특산물을 당나라 조정에서 고가로 구입하는 호시(互市), 귀족들의 주문 교역도 있었다. 반대로 당나라 사신이 신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하사품과 신라 상품을 다량 구입하여 당나라에 돌아가 팔아서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이렇게 대부분 조공무역에 의존하여 대륙의 선진적 문물이 수입되었다. 종교, 문학,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어졌는데, 일방적으로 물품이 거래 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필요한 품종에 관하여 지정요구도 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불교 또한 전진의 조공사절을 통하여 들여왔고, 백제 불교 또한 바다를 건너 동진의 공식 사절에 의해 전래 되었고, 백제가 주도하여 지나 문화의 일본에 전파도 조공의 공식 사절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이 이를 뒷받침 한다. 

장보고 대사는 조공무역의 한계를 벗어난 민간 자본에 의한 무역을 시도했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아가 당나라를 넘어 지금의 아랍 제국들까지 무역을 넓혔다.

당나라에서는 남중국과 북중국, 수도 장안을 잇는 내륙무역과 해상 교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까지 눈을 돌려 신라와 당나라,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개척하였다.

장보고는 이처럼 신라, 일본, 당나라를 잇는 해외 무역에 성공함으로 명실공히 세계 최초로 ’해양상업제국‘을 건설한 ’해상왕‘이 되었다. 

둘째. 청해진의 조직과 구성은 우리나라 최초로 다국적 기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장보고가 설진한 청해진은 오늘날의 싱가포르와 같은 독립적 서비스의 중계지이며 자유항이었다. 청해진의 조직 구성은 신라 중앙정부로부터 관리를 받지 않는 일정한 독립적인 경영 체제를 유지하였다. 장보고가 진의 설진 장소로 완도를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완도는 지역적으로 서라벌과 멀리 떨어져 있어 신라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신라, 당나라, 일본을 비롯한 멀리 서역 사람들까지 이곳에서 물건을 거래하였다. 당나라에는 견당선을 일본에는 회역사를 보내 무역을 하였다. 속 일본후기 승화 9년 정월조를 보면 장보고의 대일교역 실태를 잘 알 수 있다. 장보고는 일본과의 교역에 있어 선급금을 받고 중계무역을 행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당나라와 일본, 서역 사람들이 청해진에서 교역을 함으로써 가장 선호 받는 직업이 통역이었다. 이때 무역용어가 신라말이었음은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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