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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창간30주년과 잊을 수 없는 사연들

[독자 기고] 서해식 / 전남문인협회 이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9.11 10:28
  • 수정 2020.09.18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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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지역 언론사에 새 지평을 연 완도신문이 1990년 9월8일에 창간 1호가 나왔다. 30년만인 지난 9월 4일에 30주년 특집호가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유독 완도신문과 인연이 깊다. 창간호에 "울림의 종이 되고자 한다" 시 한편을 시작으로 서현식이란 필명으로 칼럼을 싣다가 1년 후에는 서해식 본명으로 기자도 되고 논설위원도 겸했다.

30년을 회고해 보면서 잊지 못할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완도군에서 완도군 항일운동사를 발간한다는데 금일지역에서는 이렇다 할 인물이 없어서 기자의 끼 가 발동하여 찾아보기로 했다. 완도신문 7호판에 완도의 역사인물 시리즈 3번째 란에 금일읍의 항일투사 조동민 선생을 찾아내어 실은 것이다.

후손의 집을 찾아가니 당시에 썼던 일기장을 찾을 수 있었고 한문체의 일기장을 한학에 능통한 선생을 만나 의역을 하였고 살아계신 분들의 고증을 받아서 조동민선생의 생생한 항일운동의 족적을 꿰찰 수 있었고 밤을 새워가며 원고를 작성하여 신문사에 팩스로 보내 7호 신문에 실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타자로 쳐서 팩스로 보내거나 수기로 작성해 팩스로 보내곤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사연은 12년 전이다. 금일읍 동백리 최석철씨의 장남이었다. 당시 6살 정도였다. 할머니랑 바닷가에 놀다 실족하여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겁을 먹고 소리쳤다. 누구없소. 손자가 빠졌소. 마침 선창가로 들어온 배가 있었다. 김재숙씨였다. 그분이 현장에 뛰어들어 아기를 건졌다. 김재숙씨도 다쳤다. 아기아빠인 최석철씨가 전화를 했다. 김재숙씨가 광주 한국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완도신문에 미담기사라도 내달라고 했다. 필자는 살을 붙여서 기사화했다. 이 기사가 단초가 되어 김재숙씨는 국가의상자가 되었고 이어서 조선일보제정 봉사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가의상자는 국가로부터 금전적인 보상도 받았다. 지금도 최석철씨는 완도신문과 필자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다.

또 하나 잊지 못할 사연은 2005년 8월에 중국동포 사랑방문단과 중국 길림성조선족자치구의 초청으로 중국 북간도를 방문하고 2005년 9월2일 534호에 '하얼빈에서 백두까지'라는 제목으로 문화역사탐방 기행문을 5회에 걸쳐 실었던 내용을 지금도 스크렙 신문을 찬찬히 꺼내 읽어 보니 감회가 새롭다.

필자의 환갑을 백두산에 올라서 축하를 받았고 8월15일 광복절 예배를 조선족 교회에서 필자가 대표 기도를 했으니 어찌 회상의 창가에서 떠오르지 않겠는가? 필자가 시인이 되고 에세이를 쓰는 것도 완도신문과 인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때 완도신문이 제 인생에 끊을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완도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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