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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때문에 내가 국회의원이 됐다”

[창간30주년 특집기획] '찐'독자를 만나다 ② 창간1주년 때 완도 섬 전체 연도연륙하자는 글 쓴 이영호 전 국회의원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20.09.07 10:06
  • 수정 2020.09.0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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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0주년을 맞아 완도신문이 만난 '찐'독자는 창간1주년 특집호에 완도 섬 전체를 연도연륙하자는 글을 쓴 이영호 전 국회의원이다. 이 전 의원은 국회의원 4년 임기 동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30주년 완도신문 ‘찐(진짜)’ 독자를 누구를 찾아갈까 하다 항상 완도신문에 관심을 가져주고 페이스북 친구인 이영호(63) 전 국회의원에게 연락을 걸었다. 요즘 이영호 전 의원은 해남 기라재농원에서 직접 농업에 종사하면서 해남완도진도의 생명산업에 매진하고 있다.

그런데 연락이 닿은 이 전 의원은 벌써 30년이 된거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그러며 “내가 창간호인가 1주년 기념호인가에 완도 섬을 전부 연도연륙교를 놓자는 얘기를 한 글을 써던 것 같다”면서 다음날 완도신문 사무실로 직접 오겠다고 했다.

완도신문 역사가 기록된 첫묶음판을 직접 찾아보니 당시 갓 30대를 넘은 젊은 이영호 어촌지도사가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다음날 온다던 분이 연락한 날 오히려 급하게 넘어 왔다. 이 전 의원에게 그 기사를 보여주니 본인도 “아 벌써 완도신문이 30년이 됐구나!”하고 받아넘긴다.

국회의원 임기 동안 자신은 그 글에 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도연륙교 5개를 준공하고 2개를 실행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그뒤 13년 동안 단 1개도 연도연륙교 사업이 추진되지 않은게 너무 아쉽다는 한탄을 쏟아내는 이 전 의원.

우선은 오래된 독자로서 완도신문과의 인연을 물으니 “완도에 정론직필할 신문 하나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발행인보다 김정호·김명종 기자들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의를 다해 도와 줄려고 했다”면서 완도신문이 있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를 꼭 해달라고 한다.

“완도신문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완도에 정론지가 없었다면 나같은 올바른 일을 지향하는 정치인이 협잡과 모략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국회의원 되기 어려웠다”

이어 이 전 의원은 “완도신문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문들도, 매스미디어들이 생겼다 생각한다. 완도신문을 견제하러 기관지는 못만들고 기관지 형식신문을 만들었다. 완도신문 대응 신문으로서 좀더 온유한 기관협력적인 신문사가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 김정호 편집국장이 취임하고 나서부터라고 생각하면 맞을 것 같다. 그래서 2000년인가 20003년 되니까 다른 신문이 하나씩 생겼다. 시발은 완도신문, 다른 신문이 그뒤를 이었다”며 “완도신문이 완도가 잘살게하는,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완도신문이 중추적인 신문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의원은 또한 “포스트코로나 비대면 시대가 됐다. IT(정보통신) 강국 한국으로부터 일 수 있지만 코로나 19가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완도신문이 초창기 마음으로 다시 간다면 끝나고 나면 비대면 시대가 활짝 열릴 것이다. 이럴 때 언론 역할이 더 중요하다. 제대로 사실 확인을 못하면 제대로 된 민의를 전달할 수 있는 신문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신문 다들 여력 없겠지만 인터넷 TV 만들어 간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여수넷통의 배너광고 방식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비대면 시대의 지역언론의 역할론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비대면 시대는 어떻게 행정기관과 기초의회가 해나가느냐 하는건데 실은 비대면 시대 인프라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완도신문은 30년 정도 되니까 시대의 변화에 맞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 그런 쪽 신경 쓴다면 완도신문은 완도정론으로서 완도군을 살찌우는 그런 역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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