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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꼭지 두 개, 새끼 두 마리

[완도시론] 정택진/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8.28 11:41
  • 수정 2020.08.3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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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새끼 이상의 젖꼭지를 갖는다. 소나 염소는 두 개, 개는 여덟 남짓, 돼지는 열두엇이다. 젖꼭지는 새끼를 키우는 수단이므로 동물들은 당연히 자신의 젖꼭지 이상의 새끼를 안 낳는다. 소는 하나를, 염소는 둘을, 개는 대여섯을, 돼지는 예닐곱을 낳는다. 소에 두 마리가 있고, 개나 돼지도 훨씬 많을 때가 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키우던 염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새끼였던 어미를 가져 올 때 주인은 세 마리를 낳는 종자라 했다. 그 표시라도 되는지 새끼염소는 이마와 배구리에 흰색 털이 섞여있었다. 내가 간내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염소의 젖통이 불러오는 것을 보면서 내심 세 마리를 기대했었다. 그 염소가 한 배에 세 마리가 나왔었고, 동네에 다섯 마리까지 낳은 염소가 있었으므로 내 욕심이 크게 과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염소 막에 갔더니 아주 작은 것들이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채 비틀대고 있었다. 간내를 언제 붙은지를 몰랐으니 새끼들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새끼는 두 마리였다. 더 있을 거란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새끼는 둘 뿐이었다. 좀 섭한 생각이 들었다. 세 마리 종자라는 말을 들었고, 요새는 기본이 세 마리고, 많으면 다섯 마리까지 낳기도 하는데 겨우 두 마리 라니 말이다. 혹 모르지 싶어 너른 울타리를 다시 뒤져봤지만 염소의 첫 불 새끼는 이마와 배구리에 흰 털이 박인 암놈과 수놈이 두 마리였다. 

새끼들이 젖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두 마리가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꼭지는 두 개인데 새끼가 셋이라면 문열이 하나는 언제 젖을 먹일 것인가. 새끼들이 생각이 있어 자신은 다 먹었다고 가리꼴로 다른 녀석에게 양보를 할 것도 아닐진데 그놈은 어쩔 것인가. 문열이가 둘이나 셋이기라도 한다면 그것들은 정말 어쩔 것인가. 주인이 우유를 주어 키운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내내 문열이가 될 것 아닌가. 두 마리의 새끼도 저렇게 젖통을 사정없이 박아대는데 그것들이 셋, 넷, 다섯이라면 어미는 또 그 타격을 어찌 견딜 것인가. 젖꼭지가 둘이면 한 불에 낳을 새끼를 죄다 두 마리 여야했다. 

어릴 때 보면 염소는 대부분 흰색이었고, 그것들은 평균적으로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언제인지 두 마리의 경우보다 어네이 탐뎠다.
 
언제인지 흰색의 염소는 자취를 감췄고 우리 섬의 염소는 다 검은색이다. 아마 검은 염소가 약이 된다며 흰것들은 도태시켰을 것이다. 거기에다 많은 새끼를 바라는 욕망이 끼어들어 세 마리 종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새끼는 세 마리로 늘리면서 염소의 젖꼭지를 늘릴 배려는 안한 듯 싶다. 그건 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욕망’이라는 것의 속성 자체가 확대나 확장이다. 그것은 항상 ‘더 많이’를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서 욕망은 그 전의 것을 삼키고 더 큰 것을 향해 나아간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인간사회가 쑥대밭이 되어 있다. 주기적으로 있었던 돼지열병이나 ‘욕망’이라는 것의 본질이 그렇다. 욕망은 그 자신의 욕망만 충족시키면 되지 그 대상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안 갖는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정치가 아니라, 길이 있든 없든 무한대의 황해와 확장을 속성으로 한다. 그것은 ‘더 많이’를 지향하며 그러기 위해서 그 전의 것을 삼키고 더 큰 것을 향해 나아간다. 그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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