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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른’

[완도시론] 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6.12 10:32
  • 수정 2020.06.1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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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을 잡아주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럴 일이 없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어디를 간 것을 본 적도 없다. 아마 두 분이 처가에라도 다녀올작시면, 아버지는 저만큼 앞에, 어머니는 이만큼 뒤에서 걷었으리라. 그것이 그분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였다.

그런 문화에서 자란 우리 역시 거기에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자애와 어울리는 걸 창피하게 여겼고, 좋아하는 여학생이 지나가면 그저 멀리서 가슴만 두근댔었다. 요즘은 좋아하는 애에게 마음껏 고백하고, 남이 보건 말건 손을 잡기도 하고, 좀더 대담한 경우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는 아랑곳 않고 서로 입을 맞추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문화도 변하는 것이니, 사랑의 표현에도 변화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정스레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본 것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자라는 동안 아버지가 육지에 많이 나가 있었으므로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다정스레 말을 나누는 것들에 서툴렀던 것이 더 큰 이유였으리라. 분위기가 그런지라 남들 앞에서 부부끼리 살갑게 구는 것은, 말로는 보기좋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혀를 끌끌 차는 일이었다.

‘표현하지 않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은 생각의 표현이므로, 말을 해야만 그 생각은 있어지는 것이라는 거겠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도 결국 언어를 통해 사람의 생각은 표현되는 것이고, 그걸 통해 비로소 그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렸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숱한 생각들을 하고, 우리 안에서는 수없는 생각들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다 말로 표현돼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말이 되어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저 생각으로 머물다 사라지고 만다. 또 우리는 분명 어떤 생각의 덩이가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끙끙대는 경우도 있고, 마음의 그 절절함을 표현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말은 분명 사고의 표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말이 사고의 전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어른들의 적은 말과 적은 표현이 요즘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수다스런 모습보다 사랑의 척도에서 못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꼭 바람직하다고도 여기지도 않는다. 다 드러내지 않은 채 내면에 저장해놓은 감정도 인간에게는 소중한 것 아니겠는가. 다 드러내버린 실체보다 뭔가 남아 있는 듯한 실루엣의 아름다움 말이다.

어머니가 떠나 있는 방을 정리하다가 수첩을 뒤적이게 됐다. 너덧 장에 어머니의 서툰 글씨가 씌어 있었다. ‘시월 열사흘 쌀 한 가마’. 그리고 그 뒷장에는 ‘아버님 어머님 삼월삼짓날’, ‘막둥이 사월초파일’, 그 아래에는 ‘우리 어른 팔월 스무날’이라 적혀 있었다.

동네 숙모들은 자신의 남편을 가리킬 때 ‘우리 어른’이라는 말을 썼지만 어머니가 그 단어를 쓴 적은 없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남의 식구 본 것처럼 데면데면해했고, 외려 남자처럼 무뚝뚝하게 대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도 아버지는 ‘우리 어른’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것이 꼭 남자를 ‘어른’으로 대하는 그 태도가 아니라, 어머니가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가 ‘이녁’이라는 말에 담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똑같은 감정의 깊이로서 말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마음 저 깊은 곳의 감정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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