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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의 시간

[완도시론] 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5.15 11:28
  • 수정 2020.05.1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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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은 집에서 키워지다가 그것을 키운 사람들의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개는 식용의 측면이 강했다.
반면에 소는 식구라는 인식이 강했다. 소고기가 맛있고 영양가 있는 먹거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그것도 제사나 명절에 국에 떠 있는 몇 점이 전부였으니 그랬을 것이다.

돼지는 돈을 사는 대상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이 소처럼 먹는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이 일상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육지 사람들이 먹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상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는 전통적인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지금 나에게 개는 애완의 측면이 강하다. 식용의 측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애완의 측면이 크다. 반면에 소나 돼지는 식용의 측면으로만 보인다. 이런 내 인식의 변화에는 사회적인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사회적인 태도가 개의 식용화로 흘렀다면 나에게 개는 식용의 측면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태도는 전통적인 데서 시작되어 사회적인 요소에 의해 변화된다.
키우던 개가 어릴 적에 염소를 물어 죽인 일이 있다. 염소 값을 물어 주어야 하는 것보다 우리 개가 무언가를 사냥했다는 데에 뿌듯함을 느꼈었다. 그러다가 내가 염소를 키우면서는 개를 끌고 염소 앞에 가 물어서는 안된다고 교육을 시켰다.

지금은 염소를 보면 개는 내 눈치를 살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인식의 변화인지 태도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바뀌었다.
그것의 양태에서 비롯한 것이겠지만, 고양이에 대한 내가 자란 곳의 태도는 혐오였다. 몇 몇 집에서 꼬리를 잘라 키우기는 했지만 고양이는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동물이었다.
특히나 밤에는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는 대상이었다. 고양이를 보면 작대기를 들어 쫓는 어머니의 태도가 고양이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일 것이다.

고양이가 토방에 놓아둔 개 사료를 먹었길래 그릇에다 덜어주었다. 개가 으르렁대면 그것은 고양이가 왔다는 신호였다. 몇 번 나가 개에게 야단을 쳤다.
그랬더니 지금은 고양이가 와도 개는 흘낏 보고는 땅에 턱을 괴어버린다. 아마 염소 때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인식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든 주인에 대한 반응의 결과이든 고양이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은 사실이다. 그들을 보고 있는 내가 판단했을 때 그것은 긍정적인 쪽으로의 변화이다.
그들이 세상에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개의 시간‘만’ 있어서도 안되고 고양이의 시간‘만’ 있어서도 안된다. ‘너’와 ‘나’의 시간이 같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들이 사는 세상이다.

전통적인 것이 다 옳을 수도 또 다 그를 수도 없다. 그것은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또 내가 사는 현실에 대해 반응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내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라면 대대로 내려온 것일지라도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개가 고양이에 대한 태도를 바꾸듯 말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가 비록 인간의 탈을 쓰고 있을지라도, 우리 개나, 그 개가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만도 못한 존재가 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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