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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부끄러워해야" 그날 광주에 있던 외국인들의 증언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평화봉사단원들이 말하는 '5.18 왜곡'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5.15 10:14
  • 수정 2020.05.1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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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당시 계엄군에 체포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에 실리기도 했다.ⓒ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5.18민주화운동 혹은 5.18민중항쟁. 이 같은 표현은 1980년 이후 40년 세월 동안 견고히 자리잡아왔다. 전자엔 성과가, 후자엔 세력과 성격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폭동이란 오명을 썼던 역사는 그렇게 도도하게 바로잡혀왔다.당시 항쟁의 복판 전남도청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한 미국인이 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는 이 같이 말했다."찰스 디킨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으며, 믿음의 시대이자 믿기지 않는 시대였다.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길지도 짧지도 않은 40년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힘차게 흘러왔지만 여전히 절망을 열망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폭동"이란 말을 여전히 사용한다. "외부세력"을 이야기하고 "북한군 침투"를 이야기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마저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다. 절망의 시대가 그리운 이들은 '민주의 시대를 누리며 민주를 열망한 시대를 거부하는' 모순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1980년 5월 27일 항쟁이 '잠시' 멈췄을 때, 짓밟힌 금남로의 핏자국을 눈에 담은 미국인이 있다. "소총을 든 병사들과 고압 호스로 혈흔을 비롯해 난장판이 된 거리를 치우는 사람들을 봤다"는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는 "나는 (5.18을 왜곡하는)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1971~1974년 광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했다."대한민국은 1980년 광주에서 흘린 피 때문에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5.18을 왜곡하는) 그들 또한 광주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광주를 비방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5.18은 정부의 불법적인 군사 폭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지지자가 아닌 군사독재의 지지자처럼 보인다."데이비드 돌린저와 도널드 베이커를 비롯해 총 4명의 외국인과 '5.18 왜곡'에 대해 이메일로 인터뷰했다(원래 4월에 그들을 직접 만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인터뷰 일정이 미뤄졌다). 그들은 모두 평화봉사단에 소속돼 있었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등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한국엔 1966~1981년 평화봉사단이 들어와 있었는데, 인터뷰 한 4인은 5.18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이다.데이비드 돌린저와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는 5.18의 상당 기간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인이 된 팀 원버그(Tim Warnberg)와 함께 광주 시내 곳곳을 다니며 현장을 목격했고, 외신기자 인터뷰를 주선·통역했다. 데이비드 돌린저는 당시 자신이 목격한 것과 찍은 사진을 다른 평화봉사단원에게 전했고, 이 내용은 외신을 통해 보도됐다. 폴 코트라이트는 최근 당시의 경험을 담아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영문판 <Witnessing Gwangju >)을 내놨다.40년 전 봄의 문을 두드린 이들 덕분에, 우린 따스함 속에 살고 있다. '민주(民主)'를 향한 열망은 절대다수에겐 희망이었고 특권소수에겐 절망이었다. 특권소수의 반민주를 향한 열망은 잔혹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절망의 세력이 희망의 세력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Tim Warnberg)는 1987년 쓴 논문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 >에서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인용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권력 누수를 느끼는 자들은 폭력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을 폭력으로 대신하면 승리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 대가는 크다. 패배자뿐만 아니라 승리자 또한 자신의 권력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도널드 베이커와 빌 에이머스(Bill Amos)는 5.18을 비교적 간접적으로 경험한 인물이다.

▲ 영암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했던 데이비드 돌린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했다. 사진은 2005년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은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재단 직원과 함께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찍은 것이다.ⓒ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도널드 베이커는 자신이 평화봉사단원으로 근무했던 곳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단 소식을 듣고 곧장 광주로 이동했다. 삼엄한 경계 때문에 산을 넘어 겨우 광주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계엄군이 광주를 짓밟은 5월 27일 오후였다. 그는 항쟁의 끝자락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아시아학과 교수이다.안양에서 근무하고 있던 빌 에이머스는 다른 목격자의 증언과 과거 목포에서의 근무 경험을 떠올려 1999년 <The Seed of Joy >란 제목의 소설을 내놨다

. 5.18을 다룬 최초의 외국 소설이었다.평화봉사단원들은 5.18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광주의 희생을 가슴 깊이 위로했고, 이를 왜곡하는 이들의 통렬한 반성도 요구했다. 아직도 곳곳에 구멍이 나 있는 5.18의 진실에 대한 규명도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이 기사는 본지와 오마이뉴스 기사 제공·제휴에 관한 계약에 따라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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