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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알았으랴! 하늘이 계집 아이의 손을 빌릴 줄을....

[기획] 완도의 민중영웅 송징, 김통정의 변이칭 가능성에 대한 연구 3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2.30 10:10
  • 수정 2019.12.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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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오랫동안 완도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송징 장군이 어느 순간 완도 역사에서 소거되었다. 완도를 대표하는 인물 장보고 대사의 역사성과 영웅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짐짓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송징 장군의 역사성과 영웅성을 넘겨받지 않더라도 장보고 대사의 역사적 위치가 공고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따라서 송징 장군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이 글은 장보고 대사에 귀속되었던 송징 장군의 역사성과 영웅성의 개별화와 완도 역사에서 소거(掃去)되었던 송징을 복원하고, 서남해 지역사의 한 장면을 재구성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송대장군가」에서 필자가 가장 관심을 집중하는 부분은 송징의 죽음에 얽힌 다음의 구절이다. 
이 구절은 장보고의 죽음을 연상하는 부분이기에 송징을 ‘장보고의 이칭’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장보고 죽음과의 연관성은 신무왕 김우징이 약속한 장보고 여식과의 혼사 파약 건이다. 장보고 딸과 우징 아들의 혼약을 신라 조정 중신들이 신분의 차이를 들어 거부했다. 이에 장보고의 반심을 우려해 염장이 살해했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那知天借女兒手 
어이 알았으랴! 하늘이 계집이 손을 빌을 줄을 
一夜絃血垂如縷 
하룻밤 새 활시위에서 피가 줄,줄,줄

500여 년 전 강진현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임석천은 송징 장군의 죽음에 여자아이가 관여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임석천이 남긴 「송장군」과 「송대장군가」를 통해 알 수 있는 송징의 행적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송징은 홀연히 완도로 와서 군사를 풀어 왕의 군사들과 싸웠다. 삽살개를 풀어 경계를 서는 방책도 사용했다. 변방의 사람들에게 미적추(米賊酋)라 불리며 조세미를 빼앗아 곤궁한 섬사람들을 구휼했다. 그러다가 왕의 군사들에 쫓겨 홀연히 제주로 갔으며, 제주에서 절명한 그의 죽음에 여자아이가 관여되어 있다.

구전에 의한 전승은 세월을 거치며 굴절의 정도와 왜곡의 정도가 심화한다. 전술한 강진 ‘호계석 전설’이 그 단적인 왜곡 사례라 할 수 있다. 1859년 저술된 동환록에 ‘송징의 화살이 꿰뚫었다는 ’호계석 전설’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아기장수 계열의 ‘장군바위 전설’로 변형되어버렸다. 송징을 구명하기 위한 본 글에서 500여 년 전 채문 자료인 임석천의 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다.

임석천 기록한 송징 장군의 행적을 참고하며 지리적 공간을 확장하면 사상(事像)에 대한 시선이 제주에 이른다. 범선에 몸을 싣고 홀연한 바람에 의지해 송징 장군이 닿은 곳이 제주다. 제주의 송징 장군 죽음에 여아가 관여했다는 내용을 상기하며 제주도 역사전설을 살피면 의미심장한 전설 하나와 만나게 된다. ‘제주 삼별초 지도자 김통정(金通精)의 죽음에 여자아이(애기 업저지) 관여되었다’는 아기업개 전설이다.

현용준 선생이 1960년대 발굴한 제주 아기업개 전설은 ‘김통정의 삼별초를 제압하러 제주로 온 김방경이 굳건한 성문 진입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평소 김통정에 불만을 품은 아기업개가 김방경에게 굳건한 성문을 녹이는 방책을 알려주어 김통정이 죽게 되었다’는 유형의 전설이다.

송징 장군 행적을 확인하러 제주에 왔으니 제주 땅에 서서 다시 500여 년 전 채문한 임석천의 「송장군」과 「송대장군가」를 통해 송징 장군 행적을 다시 되짚어본다. 송징 장군은 완도를 거점으로 여러 섬에 군사를 배치하고 관군과 대립했다. 세미선을 탈취해 굶주린 섬사람들을 구휼했다. 왕의 군대에 쫓겨 홀연히 제주로 떠나갔다. 제주에서 죽었는데 그의 죽음에는 여자아이가 관련된다. 왕사(王師)에 쫓겨 완도에서 퇴각해 제주에 닿은 송징 장군의 발자취가 제주에서 아기업개 전설을 만나 제주 삼별초 지도자 김통정과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송징과 김통정의 친연성에 수년간 광범위한 자료를 검토한 동기가 여기에 있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강한 친연성은 삼별초 진도시대 서남해 지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면밀하게 검토해야만 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歷史)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된다’ 했다. 음성중심주의 공동체의 많은 역사적 사실이 햇빛을 보지 못하고 달빛 그늘에서 신화로 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 필요가 있다. 달빛에 물든 신화에서 정제된 역사를 추출하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후세인의 마땅한 의무이기도 하다.

참고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완도와 함께 또 하나의 호국신사가 등재되어 있다. 제주 광양당(廣壤堂)이다. 현용준 선생이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현지 일부 주민들은 김통정을 모셨던 신당이라고 구전하고 있다. 또 광양당과 더불어 제주 무속신앙 본향논쟁(本鄕論爭)을 벌이는 구좌읍 ‘송당’이 있다. 제주 ‘송당’과 완도 ‘송징당’의 상관성에 대해 본 글 연재 전에 면밀히 검토하지 못한 아쉬움이 매우 크다. 또 하나는 오랫동안 제주 무가에서 구전되어 온 서귀포 광정당(廣靜堂)본풀이는 문헌자료가 빈약한 제주 삼별초 연구에 있어서 매우 유의미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신현성 / 한국교육진흥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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